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독도(獨島)의 행정구역 명칭이다. 경북 포항에서 258.3㎞, 울릉도에서 87.4㎞ 떨어진 국토의 막내.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길 때마다 국민적 관심이 쏠리는 곳이다.

주민이 4명뿐인 '초미니 마을'인 이곳 이장 김성도(金成道·68)씨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장이다. 40여년을 독도와 함께 살아온 그야말로 '독도의 산 증인'이다.

박원수 대구취재본부장이 지난 23일 독도를 찾아 하룻밤을 묵으며 김씨를 만났다. 풍랑이 거세면 배가 독도에 닿을 수 없는 경우가 30% 이상이라는데 오갈 때 모두 운이 좋았다고 한다. 김씨는 독도경비대와 유인 등대가 있는 동도(東島)에서 불과 150여m 떨어져 있는 서도(西島)의 어업인숙소(독도리 20-2번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새카맣게 그을린 전형적인 뱃사람 얼굴인 김씨는 일본 이야기가 나올 때면 격정을 감추지 못했다. 부인 김신열(金辛烈·71)씨도 마찬가지, 부창부수(夫唱婦隨)였다.

평소 술을 좋아하기로 소문난 김씨는 약간 어지러운 증세 때문에 한 달 전부터 전혀 술을 입에 대지 못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현재 독도에 주민등록을 둔 주민은 이장 내외와 시인 편부경씨, 등대원 1명 등 모두 4명이지만, 상주 주민은 이장 내외뿐이다. 독도 주민과 방문객의 안전관리를 위해 지난 4월 울릉군 직원 2명이 상주해 그나마 적막감이 덜하기는 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독도는 사람이 정착해 살기에는 너무 불편하고 고독한 곳이다. 그래도 독도가 좋은가?

"물론이다.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독도와 함께 생활했다. 독도 없는 김성도는 생각할 수 없다. 독도는 제2의 고향이다.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게 너무 좋다."

―독도가 좋은 것과, 독도에서 생활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왜 독도에 사는가?

"처음 1960년대 중반 독도를 일구신 고(故) 최종덕(1987년 작고)씨를 따라 독도에 발을 들여놓았다. 여기서 배를 몰면서 해녀 6~7명을 데리고 함께 해삼, 전복 등을 채취하는 작업을 했다. 젊어서는 힘도 들고 너무 적막해 솔직히 독도에는 못 있겠더라. 그러다 10년쯤 지나니 정말로 독도에 오고 싶지 뭐야. 독도에 오면 마음이 편해. 누구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말이야. 물고기나 소라, 전복 등을 많이 잡으려고 신경 안 써도 되고. 놀고 싶으면 놀아도 되고."

(김씨는 1996년까지 독도에서 살다가 태풍이 몰아쳐 집이 부서지는 바람에 독도를 떠났다. 그후 경북도가 어업인숙소를 지으면서 지난해 2월 부인과 함께 독도로 돌아와 정착했고, 두 달 뒤 독도리 이장에 취임했다.)

―평소 생활은 어떻게 하나?

"아침 5시면 일어나 날이 좋으면 오전 7시쯤 배를 타고 인근 바다에서 아내가 소라, 홍합, 전복 등을 채취하다 오전 10시쯤 마친다. 오후 2~3시쯤 다시 한 번 바다로 나간다. 아내가 제주도 출신 해녀라 솜씨가 좋지만 요즘은 통 잡히지 않는다. 기껏해야 작은 문어 몇 마리에 홍합이나 소라 몇 개, 방어 몇 마리 정도다. 독도로 오는 배 편에 부탁해 팔아 달라고 하지만 돈이 잘 안 된다. 그러니 잡은 것들은 우리 집 반찬이나 독도 경비대원들, 숙소로 찾아 오는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게 고작이다."

(부인 김씨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저 사람은 평생 돈이라고는 집에 가져온 적이 없어. 내가 울릉도에서 물질해서 아이 셋 키우고 공부시키곤 했지. 다른 사람들한테 돈 빌려주고 떼이고, 그런 일은 수도 없어. 또 한때 강화도에 가서 복어 잡이로 큰돈을 만졌는데, 그 돈을 몽땅 아는 사람들한테 선심 쓴다고 다 써버렸어." 김 이장은 "지가 벌어도 충분히 먹고 사는데, 내가 뭐 하러 돈을 갖다 주노"라고 반박했다.)

―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독도개척사의 산 증인인 이장께서는 고 최종덕씨와 함께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일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서도 산중간에 물골이라 해서 식수가 나오는 곳이 있다. 그곳에 가기 위한 계단을 놓는데 몇 팀이 실패했어. 워낙 가파른데다 배에 싣고 오는 모래가 바닷물에 다 휩쓸려 가서 그렇게 된 거야. 나는 집사람을 비롯한 해녀들과 함께 독도에서 나는 모래와 시멘트를 섞어 산꼭대기에서부터 계단을 놓았지. 1년에 걸쳐 완성했어. 1000개에서 2개 모자라는 998개야. 그 계단이 있음으로 해서 독도에 사람이 살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거야."

일본이 또 다시 독도 망언을 일삼고 있다. 독도에 살고 있는 주민으로서 어떤 기분인가?

"일본이 툭하면 그런 망발을 하는데, 솔직히 속이 상한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뺏었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독도가 자기네 것이라 우기고 있는 게 참 가관이다."

―일본이 왜 저렇게 독도에 집착한다고 보나?

"그야 뻔한 것 아닌가? 독도 바다 아래에는 거 뭐라더라, 가스 하이드레이트인가 하는 엄청난 지하자원이 묻혀 있다고 하는데. 독도 부근에는 고기도 잘 잡혀. 일본이 이런 걸 노리고 하는 짓거리 아니겠나. 일본이 저렇게 물고 늘어지는걸 보니 너무 뻔뻔스럽다고 느껴진다. 나하고 한판 붙어 보자고 하고 싶다."

(김 이장은 월남전에 파병돼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역전의 용사다. 그는 "그런데 훈장 받아 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아이들 교육비 혜택만 조금 봤지"라고 말했다.)

―독도의 영유권 보장을 위해 우리 정부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가만히 있으면 일본이 수시로 저런 망발을 쏟아 낼 텐데.

"정부가 하는 걸 보면 우리 선배들 보기가 부끄럽다. 1950년대 초 독도의용 수비대가 독도를 사수하지 않았나. 이제 그분들 중 생존해 계신 분들은 몇 남지 않았다. 정부고 야당이고 어쩌다 목청 높이는 일뿐이지, 실제로 한 일이 뭐 있나?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이 독도에 접근하면 무조건 나포했다. 하지만 1998년 우리 정부는 한일 어업협정에서 독도를 일본과의 중간수역에 포함시켜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면 안 된다. 일본이 물고 늘어지는 기회를 완전히 차단해야 한다. 평소 꾸준한 관심과 연구를 통해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온 세계가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가 돼야 한다. 일본이 아예 그런 꿈을 꿀 수 없도록 말이다."

―국민들도 일본이 망발을 할 때만 관심을 보일 뿐 평소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정말 그렇다. 요즘 독도에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만 그러지 말고 평소에 관심을 가져 달라. 또 독도에 와서 행사를 많이 하는데, 하는 것은 좋지만 제대로 해달라. 그래야 국민들이 독도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가질 것 아닌가?"

―최근 조선시대 일본으로부터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수군(水軍) 출신의 어부 안용복 선생, 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독도에 세우자는 주장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내 휴대폰 번호가 안용복 선생이 활약했던 1693년 바로 그 숫자다.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 충무공도 마찬가지다. 이런 분들의 동상을 독도에 세워 일본의 야욕을 없앨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 독도 이장 김성도씨는

독도 이장 김성도(68)씨는 울릉도에서 태어난 3대째 뱃사람이다. 1960년대 중반 독도를 찾아 그 뒤로 쭉 독도와 함께 생활해 왔다. 제주도 출신 해녀인 부인 김신열씨와 1967년 만나 결혼해 2녀1남을 뒀다. 1991년 독도로 주소를 옮겼으며, 1996년 태풍으로 집이 부서져 떠났다가 작년 2월 돌아왔다. 독도 이장 취임은 작년 4월. 경북도에서 지원하는 한달 생활비 100만원, 이장 수당 20만원이 주수입이다. 지난 2005년 국민 성금으로 마련된 1.58t 소형 어선 '독도호'를 이용해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독도에서 생활할 작정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