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팩션 《뿌리깊은 나무》(2006)와 《바람의 화원》(2007)을 2년 연속 베스트셀러 목록에 진입시켰던 밀리언하우스 출판사는 팩션 《왕의 밀사》를 올여름 장르문학 소설 시장에 도전장처럼 내놓았다. 1655년(효종 6년)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 파견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상상력을 펼친 이 작품은, 제2의 임진왜란을 획책하는 일본 주전론자들의 음모를 통신사들이 분쇄하는 과정을 그렸다. 소설을 쓴 허수정은 역사소설을 주로 쓰다가 처음으로 팩션에 도전했다. 《열하광인》, 《방각본 살인사건》 등의 작품으로 일찍부터 역사 추리소설 세계에 필명을 드높인 소설가 김탁환도 이달 말신작 장편 《혜초》(민음사)를 선보인다. 구법승인 혜초의 깨달음을 풀어 놓는 한편,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의 활약을 무협지적 서사와 추리적 상상력으로 펼치고 있다.

여름은 장르문학 최고의 성수기이다. 황금가지·비채·시작·노블마인 등 장르문학 소설을 펴내는 주요 출판사들이 여름 시장을 겨냥해 팩션·SF·추리·스릴러·칙릿 등을 일제히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그 양상이 지난해와 사뭇 다르다. 장르소설 시장을 사실상 장악해 온 일본과 영미권의 작품들이 주춤하고, 그 틈을 토종 작가들이 파고들고 있다.

교보문고 최근 통계에 따르면, 소설 분야 판매량 100위에 포함된 국내 작가들의 장르문학 소설은 2006년 정이현이 쓴 《달콤한 나의 도시》, 《뿌리깊은 나무》(이정명), 《신의 죽음》(김진명) 등 3편이었지만, 올해는 상반기에만 대한민국 뉴웨이브문학상 수상작인 유광수의 《진시황프로젝트》를 비롯해 《스타일》(백영옥), 《바람의 화원》(이정명), 《달콤한 나의 도시》, 《붉은 비단보》(권지예) 등 5편으로 늘었다.

외국 작가들이 점령했던 장르문학 시장에 최근 우리 소설가들의 활약이 두드러 지고 있다. 그림은《한국 스릴러문학 단편선》의 표지 일러스트.

장르문학 소설집도 크게 늘고 있다. 매년 1~2권 정도 출간되던 국내 작가들의 장르문학 작품집이 올해는 한국추리작가협회가 엮은 소설집 《수양대군 살인사건》(화남)을 비롯해 《한국 스릴러문학 단편선》(시작) 《한국환상문학단편선》, 《한국 공포문학단편선》(이상 황금가지) 등 6권으로 크게 늘었다. 분야도 팩션과 칙릿 위주에서 SF와 판타지 등으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처럼 장르문학 선진국의 창작 문법을 벤치마킹한 작품들도 눈에 띈다. 《한국스릴러문학 단편선》에 수록된 이상민의 단편 〈세상에 쉬운 돈벌이가 없다〉는 스토킹과 인터넷 게임 등 우리 사회의 상처와 사회적 모순 등을 추리와 스릴러 장르 안에 끌어들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대한민국뉴웨이브문학상을 비롯해 한국판타지문학상, 과학기술창작문예 등이 작품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것도 토종 장르 붐을 거들고 있다. 2004년까지 시행하다 중단된 판타지 문학상인 황금드래곤문학상도 최근의 국내 장르문학 붐을 주목해 올해부터 시상을 재개키로 했다. 지난해 창간된 월간 판타스틱은 매달 공모를 통해 국내 작가들에게 발표 지면을 제공하고 있다.

황금가지 김준혁 편집장은 "외국의 장르 소설들이 높은 저작권료에 비해 실속이 갈수록 줄어드는 반면 우리 작가들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블루 오션"이라고 말했다. 판타스틱의 조민준 편집장도 "단편을 자주 써봄으로써 우리 장르문학 작가들의 장편 창작 역량을 키워주는 장기적인 지원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