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의 '아테나학당'은 바티칸미술관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그림 복판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나란히 서 있다. 왼쪽에선 소크라테스가 열심히 자기 철학을 설명하고 그 앞에 갑옷과 투구 차림 알렉산더가 귀를 기울이고 있다. 계단 아래에선 헤라클레이토스가 돌 탁자에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다. 이 상상화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서양인의 지적(知的) 생활에 미친 영향력을 압축해 보여준다.

▶중세 때 '신학의 시녀(侍女)'라는 말을 듣던 철학은 근대 들어 인간이 다시 초점이 되면서 활기를 찾았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쏟아져 나왔고 철학은 대학의 중심이 됐다. 근대경제학의 토대를 닦은 대표적 학자들도 철학 공부에서 출발했다. 애덤 스미스는 글래스고대 도덕철학 교수였으며, 카를 마르크스는 헤겔철학에 심취했고 에피큐로스에 대해 박사논문을 썼다. 존 스튜어트 밀도 '공리주의'를 비롯한 여러 철학 저서를 남겼다.

▶'만학(萬學)의 여왕'이라던 철학의 위상은 20세기 후반부터 크게 낮아졌다. 종래 철학의 범주에 들어있던 분야들이 분화해 나간 결과 학문영역이 좁아졌고, 지식 사회에서 철학자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실용과 실리를 중시하는 사회 흐름도 철학을 위축시켰다. 대학에서도 철학은 부잣집 자식들의 지적 호사(豪奢)로 여겨졌다.

미국 대학에서 철학이 부활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그제 보도했다. 철학 전공자가 크게 늘고 철학 강좌가 수강생들로 넘쳐난다고 한다. 밀려드는 학생을 다 받지 못해 돌려보내기도 한다. 철학 토론클럽과 학생 잡지도 성황이다. 여기엔 철학을 통해 얻는 논리와 토론 능력이 법과대학원(로스쿨) 입학에 유리하다는 실용적 이유가 한몫 한다. 우리도 LEET(법학적성시험) 과목이 추리 논증, 논술, 언어 이해로 정해져 철학 전공자가 유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사회가 급변하고 직업도 자주 바뀌는 세상이다. 그래서 미국 대학생들은 특정 분야 지식보다 세상을 크게 보고 비판적 사고와 분석, 글쓰기를 익히는 것이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철학을 복수 전공하려는 학생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들은 고전을 읽고 해석하는 것보다 영화 '매트릭스'에 담긴 형이상학이나 이라크전쟁의 윤리문제를 즐겨 토론한다. 시대 흐름과 학생 요구를 외면하지 않으면 인문학의 활로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