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서부 국경도시 매솟(Mae Sod) 시내에서 맬라(Mae La) 난민 캠프로 가는 105번 도로. 인적이 드문 2차선 포장도로를 40분쯤 달렸을까. 난민 캠프에서 18년째 성경학교를 운영한다는 소우 사이몬(Saw Simon) 박사는 티크나뭇 잎과 대나무로 만든 허름한 오두막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마을 어귀에 차를 세웠다. "여기서부터 캠프가 시작됩니다."

철조망 안에는 약 4㎞에 걸쳐 9000여 가구 4만여 명이 살고 있었다. 사이몬 박사는 캠프 입구에서 멀리 티늘레 산을 가리키며, "미얀마 군사 정부의 탄압과 폭정에 못 이겨 탈출한 사람들이 이곳을 향해 지금도 저 산 속을 헤매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수 민족 탄압을 피해 국경을 넘어온 미얀마인들이 모여 사는 태국 서부 국경도 시 매솟 인근의 맬라 난민 캠프. 대부분이 미얀마 내 소수계 카렌족인 이들은 난민 캠프 내에는“노 에듀케이션, 노 잡, 노 퓨처(No Education, No Job, No Future)” 라며 절망감을 표했다. 맬라 난민캠프(태국)=유하룡 특파원

◆난민들 "하루 600원으로 생존"

최근 가족 6명과 함께 이곳에 온 헤부(Hebu·39). 미얀마의 소수민족인 카렌족 출신이다. 사흘이면 족한 길을 "버마(미얀마의 옛이름) 군인들에게 들킬까 봐 밀림으로만 다녀" 한 달이 걸렸다. 30여㎡의 2층 오두막집에 가구라 부를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작은 무쇠솥과 그릇, 수저 몇 개였다. 캠프 난민에겐 매월 어른 1인당 쌀 15㎏, 설탕 250g, 식용유 1L 등 식료품이 지급된다. 그러나 난민 등록이 안 된 그는 이웃들이 나눠주는 쌀과 음식으로 연명한다. 이미 난민캠프 9곳에 수용된 미얀마인 15만 명을 관할하는 태국 정부는 2006년 이후 신규 난민 수용에 난색을 표했다. 따라서 그는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직도 매달 2000~3000명씩 미얀마 카렌족 난민이 유입된다.

캠프에선 모든 게 부족하다. 전기가 없어 해가 떨어진 난민촌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지하수를 끌어올린 물은 400~500가구가 함께 쓴다. 캠프 내 실개천은 공동 빨래터이자, 샤워장이다. TBBC(태국버마국경컨소시엄)의 크리스 클리포드(Clifford) 현장소장은 이곳 생활을 '생존(survival)'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작년에 난민 지원에만 6000만 달러를 썼지만, 여전히 1인당 하루 20바트(약 600원)어치의 식량과 생필품으로 버틴다"고 했다.

◆미래 찾아 또다시 제3국으로

더 큰 문제는 캠프에 교육시설도, 일자리도 없다는 것. 유치원과 임시 학교가 있지만, 1만 명이 넘는 5세 이상 아이들을 전부 수용할 수는 없다. 교사도 없다. 맬라 캠프의 싸커(Saker) 부위원장은 "외부에서 젊은 자원봉사자들이 오지만, 그들은 카렌어를 모른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종일 난민 캠프를 떠돌거나, 땔감을 구하고 염소를 키웠다.

물론 이들 카렌족 난민에게 '돌아갈 곳'은 없다. 40년 넘게 독립 투쟁을 벌이던 카렌민족동맹(KNU)은 1995년 미얀마 군부에 의해 사실상 붕괴됐다. 지난 2월엔 KNU의 지도자 만샤(Manh Sha)마저 살해됐다.

이들 난민이 현재 유일하게 희망을 거는 것은 UNHCR(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의 '제3국 재정착 프로그램.' 지난 2년간 1만4000여명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과 호주 등으로 떠났다. 음악 교사 출신인 맬러리 흣투(Htoo·37)도 "2개월 전 인터뷰를 끝내고, 미국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날을 간절히 기다린다"고 했다. 싸커 씨는 그러나 "캠프 안에서 의료·교육 등을 담당하던 이들 전문 인력들이 제3국으로 떠나고 나면, 남은 이들의 삶은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