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이 교회 신도와 사회단체 회원 등 1000여명이 모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이 박사는 133년 전인 1875년 3월26일 태어났다. 추모 예배를 마친 뒤 돌아가던 김효선(이승만 기념사업회 사무위원)씨는 "이 박사 탄생 133주년인 오늘 전국에서 이런 추모 모임을 갖는 것은 우리가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각난 채 버려진 이승만 동상

비슷한 시각 성균관대 정문 앞을 지나 100m 정도 올라간 언덕배기에 있는 서울 명륜동의 주택가 2층 집. 1960년 4·19 혁명 직후 철거된 이승만 박사 동상의 일부가 보관돼 있다는 소문을 듣고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

이 집 마당이 내려다 보이는 근처 노인정 위로 올라갔다. 그 집 마당 한구석에 이승만 동상 조각이 방치돼 있었다. 남산 공원에 세워져 있던 동상의 머리 부분(길이 160㎝ 가량)은 파란 노끈이 감겨져 있었다. 또 다른 하나(길이 125㎝ 가량)는 탑골 공원에 있던 동상의 상반신 부분이다. 4·19 당시 시위대들이 '독재자'의 동상으로 몰려가 넘어뜨리거나 부러뜨린 것이다.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1950년대 자유당 집권 시절 대한노총 최고위원을 지낸 고(故) 김주홍씨가 이 동상 조각들을 고철상으로부터 사들였다고 한다. 김씨는 이 동상들을 자신의 집에 보관해 뒀다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고, 이 집을 사들인 정모(여·75)씨가 동상들도 넘겨받아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별다른 관리 없이 야외에서 눈·비를 맞으며 방치돼 온 듯 먼지가 쌓이고 녹이 슬어 있었다.

이승만 박사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는 "그렇게 버려져 있는 게 안타까워 몇 번을 사들이려고 했지만 집 주인이 너무 많은 액수를 요구해 못했다"고 말했다.

◆인하대에서는 학생들이 끌어내려

그전에 대학에 세워졌던 동상들도 모두 철거됐다. 대전 배재대학교 교정에 있던 동상은 두 번이나 끌어내려졌다. 1987년에는 운동권 학생들에 의해 동상이 철거됐다. 1990년 다시 동상이 세워졌지만, 1994년 학생들의 반발이 거세자 학교측이 자진 철거했다. 이승만 박사가 설립한 인하대 교정의 동상도 1984년 학생들이 끌어내렸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이 박사의 '온전한' 동상은 3개뿐이다. 이 박사가 살던 종로구 이화동 1-2번지의 이화장(梨花莊)과 배재고 교정, 국회 본관에 하나씩 세워져 있다. 해외에는 이 박사가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던 미국 하와이에 하나가 있고, 조만간 워싱턴 아메리칸 대학 교정에도 세워질 예정이다.

이화장 안뜰의 동상(약 2m)은 1988년 건국 40주년을 기념해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동상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졌다. 이 때에도 정부나 외부 지원 없이 이승만 기념사업회 회원들과 재미 교포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세웠다.

서울 고덕동 배재고 교정에 있는 동상(약 2.5m)은 작고한 여류조각가 김정숙씨 작품이다. 1900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 박사를 기리기 위해 1984년 이 박사가 서거한 지 19년 후에 세웠다.

국회 본관 중앙홀의 동상(2.25m)은 2000년 5월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을 기려 세워졌다. '건국대통령'의 명칭이 아니다. 이 동상 건립안은 지난 1997년 국회에 제출됐지만 일부 의원들이 "발췌개헌·사사오입개헌 등으로 의회 정치를 허물어뜨린 독재정치의 장본인"이라며 반대해, 1999년 12월에서야 본회의를 통과됐다.

이승만기념사업회 회원 유기남(83)씨는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김구·안창호 선생 등의 동상은 누구나 접하기 쉬운 공원이나 광장에 세워져 있지만, 이 박사 동상만 애써 찾아가야 하는 곳에 꽁꽁 숨겨 놓은 것 같아 애석하다"고 말했다. 이승만과 정치적 라이벌이던 김구 선생의 동상은 서울 남산 공원과 인천 대공원, 경기도 구리고등학교 교정에 있다.

◆'이승만 지우기'

4·19 이후 장면(張勉) 내각이 들어서면서부터 '이승만 지우기' 흐름이 본격화되고 권위주의 정권을 거치면서 이승만의 존재는 사라져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산의 용두산 공원 명칭이다. 1955년 이 박사의 80회 생일을 기념해 그의 호를 따 '우남(雩南)공원'이라고 명명했다가 4·19 직후 용두산공원으로 되돌아갔다. 이 박사 집권 때 10여종의 화폐에 새겨졌던 이승만 초상들도 1962년 무렵 대부분 사라졌다. 1994년 조직된 이승만기념사업회도 '홀대'받기는 마찬가지다. 정부 지원금은 매년 열리는 이승만연구학술대회 때 받는 300만원이 전부다. 백범기념관에 대한 정부 지원금이 작년 10억원에 이르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연세대 사회학과 유석춘 교수는 "이 박사에게는 공(功)과 과(過)가 있는데, 과거 정권들은 '과'만 강조해왔다"고 지적했다. 집권 말기에 '3선(選) 개헌 파동' 등 독재의 과오가 있었지만, '건국 대통령'으로서의 공을 외면해서는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차상철 충남대 교수(역사학)는 "이 박사의 가장 큰 공은 미국이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여겼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대한민국의 안보를 확보한 것"이라며 "정부수립 60주년이 되는 올해에는 이 박사의 역사적 평가를 다시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