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반의 어느 겨울날. 중학교 입학을 앞둔 앳된 소녀가 돼지저금통을 꼭 껴안은 채 명동 집에서 충무로까지 걸어갔다. 충무로 3가의 한 양재학원에 들어간 소녀는 저금통을 내놓으며 말했다. "저 여기 다닐래요. 학원비는 이거면 될까요?"

그렇게 옷을 만들기 시작한 소녀는 40여 년이 흐른 지금, 세계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들과 나란히 파리 무대에 서는 디자이너가 됐다. 파리에서 활약하고 있는 문영희<사진>씨의 이야기다. 그는 전 세계 디자이너들이 한 번이라도 서 보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인 파리 컬렉션 '프레타포르테(고급 기성복 패션쇼)'에 1996년 가을부터 한 시즌도 거르지 않고 참가해 왔다.

23일 열린 서울 컬렉션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문씨는 "끼는 타고나는 모양이에요"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조물거리며 양말, 벙어리장갑 등을 뜨곤 했어요. 중학교 때는 가정 책에 나오는 옷본을 보고 혼자 부인복을 만들었죠." 옷 만드는 일은 '팔자 센 여자'나 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딸의 장래를 걱정한 어머니는 밤새워 재봉틀을 돌리는 딸을 보다 못해 아예 두꺼비집 퓨즈를 내려 집안 전원을 차단해 버렸다. 디자인 가방을 갖다 버린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 문씨에게 힘이 돼 준 것은 사업가였던 아버지였다. "'저런 재능은 드문 것'이라며 절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셨어요. 해외출장을 다녀오실 때마다 최신 패션 잡지들을 사다 주곤 하셨지요."

문씨는 자연스레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도시, 파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국제 무대에 서는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성균관대 불어불문학과에 진학했다. 1969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한 패션회사에 수석 디자이너로 입사했고, 1975년엔 자신의 성(姓)을 딴 '문 부띠끄'를 설립했다. 꿈에 그리던 파리에 'SARL'이란 법인을 낸 것은 1994년. 1995년 겨울 파리 패션협회로부터 인정을 받아 이듬해 '프레타포르테' 가을 시즌에 참가하게 됐다.

실패를 모르고 순탄하게 디자이너의 길을 가던 문씨에게 1997년 처음으로 난관이 닥친다. 그해 한국에 몰아닥친 IMF 한파의 여파였다. "바이어들의 절 보는 눈길이 싸늘해졌어요. '한국 경제가 완전히 몰락했다는데 쟤는 언제 끝나는지 한번 두고 보자' 하는 듯한 느낌이었지요."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던 그에게 처음으로 '경제적 위기'가 닥쳤다. "바게트에 버터도 못 발라 먹을 정도로 쪼들렸죠. 8명 있던 직원을 4명으로 줄이고 새벽 2~3시까지 일했어요. 거리를 걷다 보면 서러워 눈물이 줄줄 흘렀지요. 일류 스태프들은 동양인인 데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함께 일하길 거절하고…."

그로부터 10여 년, 문씨의 작품들은 지난 2일 열렸던 파리 컬렉션에서 루이 비통, 랑방, 미우미우 등 쟁쟁한 브랜드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그는 "의욕이 넘쳤던 청소년 시절의 꿈과 느낌을 항상 작품의 모티프로 삼는다"고 했다.

"저는 언제나 '20년이 지나도 입을 만한 가치가 있는 옷을 만들자'는 생각을 하며 옷을 만들었어요. 이런 나만의 목표와 철학을 붙들었기에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많았음에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오늘까지 올 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