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여 만에 잿더미로 변해 주저앉은 숭례문(남대문) 화재사건은 우리 방재시스템에 얼마나 큰 구멍이 뚫려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398년(태조 7년) 건축돼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전쟁을 견디며 600여 년간 웅장한 자태를 뽐내던 '대한민국 국보 1호'가 전소되면서 우리 국민의 자존심도 함께 새까맣게 타버린 것이다.

한양대학교 건축공학부 지남용 교수는 "멀쩡하던 숭례문이 잿더미로 무너져 내리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가 숭례문을 얼마나 엉터리 보호시스템 속에 방치해 두고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엉터리 문화재 화재 대응 매뉴얼

숭례문 화재가 이처럼 커진 것은 문화재 화재에 대비하는 기본적인 수칙조차 마련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이 지난해 국정감사 때 정병국 의원(한나라당)실에 제출한 '문화재별 화재 위기 대응 현장 조치 매뉴얼'(18쪽)에는 문화재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진압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거의 없다. '침착한 소화활동'이라는 항목에서 '불꽃의 아랫부분을 끈 후 윗부분을 꺼야 하며 화점(火點)을 중심으로 포위하여 소방시설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만 돼 있다.

어느 부분에 물을 집중적으로 쏟아 부어야 하는지, 목조건물에 불길이 숨어 있는 곳은 어디며, 잔불을 정리할 때 주의해야 하는 점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없다. 소방당국이 화재 발생 한 시간여 뒤 큰 불길이 잡힌 것으로 보고 잔불 작업에 나선 것도 전통 목조건물 화재에 대한 기본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매뉴얼이 없는 현장의 소방관은 우왕좌왕했다. 숭례문 화재현장에서 진압에 나섰던 한 소방관은 "국보 1호라서 불을 꺼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망가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선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소한의 화재 안전장비도 없어

숭례문에는 스프링클러, 화재경보장치와 같은 기본적인 화재 안전장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유일한 소방장비는 누각 1, 2층에 4개씩 놓여 있던 소화기 8대가 전부였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숭례문은 국보급 목조 문화재이고 소방서도 1분 거리에 있어 스프링클러 같은 장비를 설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남용 교수는 "보기 흉해서, 또 돈이 들어가니까 스프링클러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말인데, 문화재를 모두 태워 버리는 것보다는 비용을 들여 보기 좋게 설치하는 것이 효율적이다"고 말했다. 안형준 건국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화재감지기 하나 없이 단지 소화기 8개로 국보 1호를 지켜낼 것이라고 판단한 정부에 우리 국민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우 대웅전 등 4개의 건물이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와카야마현 고카와지라는 사찰엔 건물 내·외부에 연기감지기, 불꽃감지기, 온도감지기 등 무려 215개의 감지기가 설치돼 있다. 화재가 발생하면 곧바로 이를 감지, 경보시스템과 연결된 컴퓨터에서 즉각 화재장소를 화면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사찰 곳곳에 설치된 음향장치와 연결돼 음성으로 방송이 나온다. 또 건물 정면과 후면, 측면에 배치된 6개의 방사총(흔히 물대포라 불림)이 자동으로 물을 쏘게 된다. 건물 외부를 우산으로 막은 듯 물로 완벽히 가려 불이 번지는 것을 막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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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감시하는 사람 없었다

전문가들은 방화라고 추정되는 이번 사건에서 숭례문을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숭례문은 오후 8시 이후에는 상주하는 관리인 없이 무인 경비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단지 적외선 카메라에만 의존해 외부인의 출입 사실만 감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문화재 화재는 방화에 의한 경우가 잦아 감시인력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실제로 화재발생 직전인 10일 오후 8시47분 야간 경비업체인 KT텔레캅의 경비시스템에 침입자가 있다는 적외선 신호가 감지돼, 이 업체 직원이 10분쯤 뒤 현장에 도착했으나, 숭례문엔 이미 불이 붙은 상황이었다. 무인 경비가 아무런 방비를 못했음을 드러낸 것이다. 경원대 박형주 교수는 "수원 화성 서장대의 경우에도 1996년과 2006년 두 번의 화재가 있었는데 모두 방화였다"며 "불이 나도 감시인이 배치되지 않아 두 번씩이나 화재를 막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화재 진화훈련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서울중부소방서는 지난해 4월 회현 119치안센터와 함께 숭례문 화재 대비 가상훈련을 했다. 그러나 실제 훈련이 아니라 화재가 발생했을 때 소방차를 어디에 세울 것이냐는 등의 형식적인 훈련에만 그쳤다. 전문가들은 문화재청소방방재청의 합동훈련이 제대로 실시되지 않은 것도 큰 문제로 지적했다. 문화재는 '보존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일반적인 방식의 진화가 어려운 특징이 있다. 때문에 문화재 화재는 문화재청과 소방방재청 간의 합동훈련이 필수적이다. 안형준 건국대 교수는 "전통 건축물은 지붕 바로 밑 흙 속에 '적심목'이란 나무가 박혀 있는 독특한 양식을 갖고 있는데도 소방관들은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현장에서 우왕좌왕했다"고 말했다.

경원대 박형주 교수는 "산림청에 산불을 전담하는 전문인력이 있듯이 문화재청에도 문화재 화재를 전담하는 팀이 항시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