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숭례문이여. 이 죄를 어찌할꼬. 대체 어찌할꼬. 600년의 세월을 민족과 함께했던 그 문은 무너져 버렸다. 검은 연기와 불길 사이로 그렇게 내려앉았다. 호기롭던 양녕대군의 글씨가 새겨진 현판은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고 곱고 단아하던 단청들은 불길의 혀가 삼켜버렸다. 하늘을 향해 날렵하던 누각은 검은 그림자처럼 흔들리다 사라져 갔다. 임진왜란의 전화 속에서도, 6·25의 포화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아 민족과 명운을 함께했던 그 역사의 문은 처연하게 무너졌다. 무너지고 불탄 것이 어찌 집뿐이랴. 불탄 기와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릴 때 우리의 마음도 함께 무너지고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세계에 나가 높은 집을 짓는다고 자랑하지 말아라. 오늘 우리는 다만 부끄럽다.

숭례문. 애초에 그것은 세월을 이고 선 왕조의 집 한 채만은 아니었다. 그저 숨결 없이 서 있는 흙과 나무로 된 누각일 뿐이었다면 이 억장 무너지는 슬픔을 설명할 길이 없다. 차마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워 흐린 구름이라도 겹겹이 드리워 동터 오는 하늘빛을 막아주었으면 싶었던 참담한 마음 또한 설명할 길이 없다. 국보 1호라서, 2호보다 더 소중하다는 그런 숫자놀음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혈육이었고 숨결이었음을 차마 뉘라서 부인할 수 있으랴.

숭례문이 시커먼 잔해만 남은 모습을 드러내자, 11일 많은 시민들이 마치‘숭례문의 죽음’을 애도하듯이 숭례문 잔해 앞에 조화를 놓고 있다.

1398년 조선왕조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이후, 숭례문은 늘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여러 차례의 개·보수 공사를 통해 상처와 흉터들을 제 안에 간직한 채로, 한민족의 영광과 고난의 순간들을 고스란히 함께해 왔다. 이 땅과 백성들이 찢기고 아파하고 울부짖던 순간순간을 같이 견뎌내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했던 시절에도, 기적적인 발전을 이루어냈던 시절에도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새벽에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고 달랑 가방 하나 들고 서울역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들에게는, 설렘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민초들의 발길과 숨결이 닿는 바로 곁에서 한 식구처럼 볼 것, 못 볼 것 죄다 보아오며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리 장엄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수더분한 낯빛으로 우리와 눈을 맞추어왔다. 민족의 자랑이자 상징으로서, 역사의 증언자로서 언제까지나 함께할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사라져 버렸다. 말없는 것들은 이렇게 사라지고 나서야, 남은 사람의 가슴을 찢어놓는가.

오늘 숭례문을 불태워버린 것은 바로 우리다. 역사의 유물로만 밀쳐두고 진정 가슴에 담아 귀히 간직할 줄 몰랐던 우리의 업보이다.

재난의 기억은 유난히 빨리 잊혀진다. 불길에 휩싸이던 낙산사의 기억도, 수원 화성의 화재도 우리는 잊어버렸다. 숭례문의 불길은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다시 내린 아픈 채찍이다.

더 이상은 부끄러운 일들을 잊지 말자. 무너진 자리에 숭례문의 역사를 다시 세우자. 우리의 부끄럽고 아픈 오늘을 후손들에게 낱낱이 전하며 철저한 고증을 거쳐 복원하자. 이것이 그나마 역사 앞에 속죄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우리 곁을 떠나간 숭례문이여.

하늘은 잔뜩 흐리고 차마 나는 얼굴 들고 조사(弔辭)나마 읽을 수가 없구나.

용서하라 숭례문이여. 미안하다 숭례문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