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선동렬, 1세기에 한명 태어날까 말까한 대선수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이 고장 났다. 광주 경기때부터 허리통증을 호소해오다가 인천 원정경기에서 그만 탈이 나고 만 것이다. 다음 스케줄로 인해 선수단이 광주가 아닌 전주로 옮기는 바람에 선동렬은 전북대병원 정형외과 황병연 과장의 진찰을 받고 있었다.

나는 급히 전북대병원으로 향했다. 황 과장은 진찰결과 ‘스테로이드’ 호르몬제를 이용한 국소 처치가 필요할 것 같다는 소견을 냈다. 그러나 워낙 유명한 선수여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나는 김응룡 감독과 선동렬을 면담하고 일단 다음날 경기출장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판단은 물론 세 사람만의 비밀에 부쳐졌다. 주치의인 나 역시 팀의 숙소인 코아호텔에 머물지 않아야 했다. 상대팀이 해태와 같은 호텔에 묵고 있어 그들에게 약점을 노출시킬 단초마저 사전에 봉쇄하자는 작전이었다. 호텔에서 빠져나와 다른 찻집에서 김 감독과 나는 ‘삼국지’를 떠올렸다.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내쫓았다는 얘기 말이다.

작전은 기막히게 맞아 떨어졌다. 선동렬의 불펜피칭만 보고 있어도 상대편 선수들의 오금이 저린다는, 시위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다. 그날 경기의 승리로 해태는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쾌거를 낳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걱정이 장마구름처럼 까맣게 밀려왔다. 선동렬의 허리 때문이었다. 며칠 뒤 모든 매스컴이 선동렬이 부상당한 해태가 한국시리즈를 어떻게 치를 것인지에 주목하며, 연일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했다. 주치의인 나 또한 그들의 표적이 될 게 분명했다.

해태 코칭스태프와 나는 일단 큰 부상이 아니라는 것에 입을 모으고, 취재에 응하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통과 문지방에 불이 나더니 ‘선동열은 허리에 의학적으로 문제가 없다. 10일간만 쉬면 운동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그러나 사건은 엉뚱한데서 터졌다. 선동렬의 집에서 항의전화가 온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의사들 얘기에 따르면, 3주 정도는 쉬어야 운동을 할 수 있다는데, 그렇게 발표할 수 있소? 10일 후면 정말로 운동이 가능한 거요?"
난감했다. 그러나 내 견해를 똑 부러지게 말할 수밖에….

“운동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10일 후 감독과 동열이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한국시리즈라는 대 전쟁을 앞두고 우리 장수가 고장 나서 싸움터에 나가지 못한다고 미리 발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 혼자 결정한 게 아니고 구단, 감독과 상의해서 발표한 것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전들 ‘동렬이 허리는 한 달을 치료해야 합니다’라고 말할 줄 몰라서 그랬겠습니까? 일단 제가 총대를 메기로 했으니,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어쨌거나 항상 나의 팔자는 돌팔이 신세였다. 허리가 삐었으면 당연히 3주 정도는 쉬어야 하고 안정을 해야 한다, 이것이 의사의 본연의 임무일진대, 내 천직인 의사의 본분을 버리고 팀주치의 노릇에 더 충실할 수밖에 없었으니 선동렬의 가족들처럼 다른 사람들 역시 나더러 돌팔이라고 비난해 마지않았을 것 아닌가.

그러니 돌팔이 의사라는 말을 오죽 많이 들었으며, 그럴 때마다 나는 쓴웃음을 짓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해 어떻든 선동렬은 마운드에 서서 훌륭한 에이스로서 구실을 하고 해태 타이거스가 또 한해 우승을 하는데 중요한 몫을 해냈다.

마지막 회 우승이 결정되는 순간, 일련의 여러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면서 내가 언제까지 돌팔이 노릇을 해야 할지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또 언제나 우리 해태 구단의 재정이 넉넉하여 다른 팀처럼 충분한 선수를 확보해 부상 선수들에게 지워지는 짐이 가벼워질 것인가. 그러면 선수들에게 인기 좋은 주치의가 될 수 있을까. 축포를 바라보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흘러가는 것이었다.

임채준(전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 현 서남의대 교수)
(제공=한국야구위원회)

[Copyright ⓒ 한국 최고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OSEN(www.osen.co.kr) 제보및 보도자료 osenstar@ose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