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반미(反美)·좌파 연대의 선봉장을 자처하며 사회주의 국가 건설과 종신 집권을 꿈꿔온 우고 차베스(Ch�vez)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안방’에서 일격을 당했다. 대통령 연임제한 철폐와 언론 통제 등을 골자로 한 그의 헌법 개정안이 2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예상을 뒤엎고 찬성 49.29%, 반대 50.7%로 부결된 것이다.

3일 오전(현지시각) 선거관리위원회가 이 사실을 발표하자 투표 마감 후 거의 정적 상태였던 수도 카라카스 등 베네수엘라 곳곳이 순식간에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특히 야당 당원과 학생 등 차베스 반대세력들은 일제히 거리로 뛰쳐나와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불꽃놀이를 벌이는 등 축제분위기에 휩싸였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작년 대선에서 차베스와 맞붙었던 야당 지도자 마누엘 로살레스(Rosales)는 “오늘밤 베네수엘라는 승리했다”고 말했다.

같은 시각 차베스 대통령은 TV 연설을 통해 “내 제안에 반대한 여러분께 감사하고 축하드린다. 당신들이 이겼다”며 패배를 인정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개헌안 부결에 따라 차베스는 2013년 1월 재선 임기가 끝나면 다시 대통령에 오를 수 없게 됐다. 그러나 그는 “개표 결과가 대접전이었다. 50%를 득표하진 못했지만 거의 해낸 거나 다름없다. 개헌안은 죽지 않았다”고 말해 개헌을 재추진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지난 8월 차베스는 ‘21세기식 사회주의’를 이루겠다며 ▲중앙은행의 국가 통제 ▲사유재산보다 공동재산 우선 ▲혐의 없이도 인신 구속 허용 ▲재난이나 비상사태시 언론 검열 등의 내용을 담은 개헌안을 내놨다.

개헌안은 유전과 통신·전기산업, 토지의 국유화 등 그가 추진해온 일련의 ‘사회주의 개혁’의 완결판에 해당한다. 차베스는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빈곤층에 대한 각종 선심성 정책들 덕에 1999년 집권 이후 총선, 대선, 지방선거 등 모든 투표에서 승리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동안 차베스에게 온정적이었던 학생들이 그의 노골적인 권력욕을 본 뒤 개헌 반대 가두 시위에 나서는가 하면, 그의 오랜 친구였던 라울 이사이아스 바두엘(Baduel) 전 국방장관도 반대 세력으로 돌아서는 등 지지층 내부에서 이반 세력이 속출했다.

하지만 정부가 외부 선거 감시기구와 야당 의원들을 투·개표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 “부정선거로 투표 결과를 조작하려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개헌안은 결국 가결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결과는 차베스에게 ‘기절할 정도의(stunning)’ 패배나 다름없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도 이번 패배로 베네수엘라를 사회주의화하려는 차베스의 작업 속도가 늦춰질 것으로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