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울 청담동의 알려진 카페에 가보면 입구에 잔뜩 쌓여있는 잡지를 볼 수 있다. '무슨 잡지인가' 하고 보면 "얼마든지 갖고 가시라"는 말이 돌아온다. 바로 럭셔리 잡지들이다. 강남의 웬만한 피트니스클럽이나 레스토랑, 헤어 살롱, 스파에 가봐도 마찬가지다. 몇 권 안 남았다 싶었는데 얼마 뒤에 보면 다시 수북이 쌓여있다.

1990년 '노블레스(Noblesse)' 창간을 시작으로, 국내에 럭셔리 잡지가 생겨났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이 시장은 '노블레스' '네이버(Neighbor)' '오뜨(Haute)' 3강 구도였다. 당시 고급 브랜드와 고급 문화를 소개하는 새로운 컨셉트가 관심을 모으기도 했지만 "잡지인지 카탈로그인지 모르겠다"며 시큰둥한 반응도 많았다. IMF 위기 때엔 고가 사치품 소비를 부추기는 주역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도 쏟아졌다. 하지만 이들 럭셔리 잡지는 2000년을 전후로 매출액 규모에 있어 20~30%씩 성장했다.

럭셔리 잡지가 봇물처럼 쏟아진 것은 바로 이때다. 우후죽순 생겨나다보니 창간한 지 얼마 안돼 폐간한 잡지도 생겼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이젠 '럭셔리 잡지'라는 하나의 시장이 형성됐고, 발행 부수나 영향력 면에서 잡지들 간 서열도 생겨났다. 유명 럭셔리 브랜드는 국내에 처음 상륙하거나 신제품을 출시할 때 이들 잡지에 먼저 기사나 광고를 내면서 '신고식'을 치르고 있다.

요즘 들어선 특급 호텔이나 백화점, 카드 회사까지 VIP 고객을 대상으로 한 럭셔리 잡지를 만든다. 갤러리아 백화점의 잡지 ‘더 갤러리아(the galleria)’를 만드는 외주 제작사는 최근 ‘뮈인(Muine)’이라는 또 다른 럭셔리 잡지를 펴냈다. 라이선스 패션지였던 ‘마담 피가로’는 지난 5월 재창간하면서 멤버십 럭셔리 잡지로 성격을 바꿨다. 현재 알려진 럭셔리 잡지는 십여 가지로 추산된다. 그러면 이렇게 럭셔리 잡지가 늘어나는 이유는 무얼까. 우선 돈이 된다는 말이다. 광고 물량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수만 부를 무가지(無價誌)로 찍어낼 수 없다. 럭셔리 잡지의 창간 행렬 배경엔 급성장한 국내 럭셔리 브랜드 시장이 있다.

1990년대 말 한국에 대거 들어온 해외 럭셔리 브랜드는 값비싼 자사의 고급 제품을 알려야 했다. 그 역할을 이들 럭셔리 잡지가 광고와 기사로 맡았던 것이다.

한 럭셔리 잡지의 기자는 “IMF 위기 당시, 다른 잡지들이 하나 둘씩 쓰러질 때 광고주 대부분이 외국계 럭셔리 업체였던 럭셔리 잡지들은 오히려 성장했다”며 “안정적 수입을 거둘 것으로 보고 이 시장에 뛰어든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소비력이 높은 특정 계층만을 상대로, 그것도 무가지로 발간한다는 점은 럭셔리 브랜드 입장에서 가장 반기는 대목이다. 한 외국계 럭셔리 브랜드의 임원은 “우리 같은 고급 브랜드엔 불특정 다수에게 무작위로 배포되는 매체보다는 우리 물건을 구매할 것으로 보이는 잠재 소비자층만을 타깃으로 알릴 공간이 필요하다”며 “특히 이들이 주로 다니는 호텔, 스파, 피트니스클럽 등에 잡지가 뿌려지는 것에 큰 매력이 있다”고 했다.

그는 “비록 몇 만 부만 발행된다고 하더라도 배포만 제대로 되면 우리로선 한 페이지에 300만~400만원하는 광고비를 절감하는 셈”이라고 한다. 비용 대비 효과가 확실하다는 말이다.

잡지를 돈 주고 사서 보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사회 현상도 무가지인 럭셔리 잡지 시장을 키우는 데에 한몫한다고 한다. 럭셔리 브랜드의 한 홍보 담당자는 “돈을 주고 패션 잡지를 사는 층은 패션 리더나 젊은 여성층”이라며 “그보다는 돈 많은 주부나 사업가에게 공짜로 뿌려지는 럭셔리 잡지에 나와야 제품 판매로 이어지는 효과가 높다고 본다”고 했다.

실제로 소비력이 높은 주부가 이 잡지를 읽고 제품을 산다거나 제품에 대해 말을 하는 것 하나까지 효과로 간주된다.

럭셔리 잡지는 상류층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담는다. 패션과 뷰티, 인테리어는 물론 여행, 요리, 건강, 문화·예술 분야를 망라하는데 주로 ‘돈을 어떻게 쓸지’에 관한 것들이다.

10년 전만 해도 모 유명 브랜드의 히스토리처럼 소비자를 교육시키는 내용이 많았다면 요즘은 프랑스 고성(古城)에서 휴가 보내기, 미술품 투자 시 주의할 점, 재테크 요령과 자녀 유학 안내 등 상류층을 타깃으로 한 다양한 내용이 담긴다. 기사와 광고 두 가지 개념을 섞어놓은 ‘애드버토리얼(advertorial)’면도 적극 이용한다. 예를 들어 한 브랜드의 제품으로 10여쪽의 화보를 만드는 식이다. 이럴 경우 잡지사는 한 쪽당 얼마씩 광고비를 받고 모델 섭외나 메이크업 같은 비용은 브랜드가 추가로 지불한다고 한다.

럭셔리 잡지는 일부 대형 서점에서 8000~9000원에 팔기도 하지만 극히 드문 경우다. 대부분 아무 곳에서나 구입할 수도 없고, 팔지도 않는다. 대신 이들 잡지는 고급 호텔이나 피트니스클럽, 골프연습장, 수입 차 전문 매장 같은 곳으로 보내진다. 고급스럽고 트렌디한 식당과 카페로도 배포된다.

소비력이 높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잡지를 배포하는 유통망이야말로 이 잡지들의 힘이다. 광고주들도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보다는 “어느 곳에 갔더니 그 책이 있더라” 같은 기준으로 광고 게재 여부를 결정한다. 네이버의 백승호 본부장은 “청담동 일대 거주자나 강남 인근 아파트의 50평 이상 거주자, 백화점 소비 상위 고객에게 배송된다”고 했다.

한 라이선스 패션지 기자는 “럭셔리 잡지는 ‘고기 반, 물 반’이라고 할 정도로 광고뿐인 카탈로그 아니냐”고 했다. 실제로 패션지는 광고가 전체의 20~30%인 반면 럭셔리 잡지는 50% 를 웃돈다. 이에 대해 한 럭셔리 잡지 기자는 “인쇄 매체는 어떤 광고주를 확보하고 있는지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그만큼 럭셔리 잡지를 찾는 수요가 있다는 말 아니겠느냐”고 했다.

W서울워커힐의 PR 매니저 캐서린 강은 “돈을 주고 잡지를 구매하는 사람이 줄면서 파트너사가 대량 잡지를 구매해 자기 손님에게 선물하는 방식을 쓴다”며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개념이 호텔이나 백화점에서 자체 제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럴 경우 자사의 고객만을 타깃으로 하는 등 용도는 더욱 명확해진다. W서울워커힐의 ‘후 매거진(WHO MAGAZINE)’이나 신라호텔의 ‘노블리안(NOBLIAN)’처럼 호텔에서 펴내는 럭셔리 잡지는 호텔 내 소식을 비롯해 외국 골프 투어나 고급 리조트, 오페라 관련 내용을 담는다.

롯데백화점 명품관 애비뉴얼에서 펴내는 ‘애비뉴얼(AVENUEL)’은 서점에서 1만원에 팔기도 한다. 현대백화점에서 펴내는 ‘STYLE H’ 는 잡지 내용을 백화점에서 쇼핑하듯 매장의 각층 배치와 유사한 섹션으로 만들었다.

비씨카드가 연회비 12만원인 플래티넘 회원을 대상으로 매달 13만~15만부를 발행하는 ‘The BC’라는 잡지도 있다.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이 잡지에 “그를 위해 준비했어요”라는 선물 소개가 실렸는데, 이때 선물 목록에 오른 브랜드 업체로 제품 문의 전화가 많았다고 한다.

한 럭셔리 매거진의 패션 에디터는 “럭셔리 잡지만큼 독자층이나 광고주를 바늘로 집어낸 듯 타깃화한 미디어는 이제껏 없었다”며 “럭셔리 시장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듯이 럭셔리 잡지가 담아내는 내용이나 유통 방식도 그에 맞게 진화할 것”이라고 했다. 쭗

국내 첫 럭셔리 잡지 ‘노블레스’

창간 17년에 7만부 발행하는 업계 1위
중국판만 10만부… "두바이·러시아도 간다"

요즘 잡지 '노블레스(Noblesse)'의 명제열 사장은 부쩍 상하이와 홍콩 출장이 잦아졌다. 지난 2004년 9월 상하이에 지국을 세우고 노블레스 중국판을 론칭하면서부터다. 당시만 해도 성공을 확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현재 노블레스 중국판은 상하이와 베이징, 광저우 등 중국 내 10개 도시에서 10만부가 발행된다. 광고나 유통 등은 럭셔리 브랜드의 아시아 본부가 있는 홍콩의 사무실에서 총괄한다.

실제 상하이의 고급 호텔이나 매장에 가보면 노블레스 중국어판이 있다. 중국어판은 한국에서 만든 내용(40%)에 현지 편집팀이 제작한 내용(60%)으로 만들어진다. 잡지가 배포되는 곳이나 판매, 유통망은 모두 한국 모델 그대로다.

명제열 사장은 "중국은 모든 럭셔리 브랜드가 군침을 흘리는 성장 가능성 높은 시장"이라며 "중국에 진출하는 럭셔리 회사와 이곳의 신흥 소비자층에 브랜드를 알리고 고급 라이프 스타일을 다룬 우리 같은 잡지가 매우 필요하다"고 했다.

노블레스는 1990년 창간한 국내 최초의 럭셔리 잡지로, 발행 부수 7만부로 업계 1위다. 업계에서 유일하게 ABC 협회에 등록해 발행부수를 공개한다. 창간 때부터 여행과 문화, 재테크 등 라이프 스타일을 강조하며 기존의 라이선스 패션 잡지와 차별화를 꾀했다. 지금은 일반화됐지만 잡지 표지를 브랜드에 파는 개념도 1990년 처음 시작했다. 노블레스의 이윤정 편집장은 "한 달에 한 번만 책을 보내는 게 아니라 우리 잡지가 깔리는 곳을 계속 확인해 모자라면 다시 채우는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식 유통망도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노블레스는 중국 시장을 교두보로 3년간 일한 경험을 살려 다른 도시로 유통망을 넓히고 두바이와 러시아 쪽으로 진출할 계획이다. 명제열 사장은 "이제 한국 시장이 아닌 아시아 지역에서 최고의 하이엔드 라이프 스타일 잡지로 자리잡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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