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35)씨의 불똥이 그가 근무했던 성곡미술관의 박문순(53) 관장에게 튀고 있다. 박 관장은 김석원(62) 전 쌍용그룹 회장의 부인이고, 성곡미술관은 쌍용그룹의 창업자인 고(故) 김성곤 회장이 살았던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미술관이다. 박 관장 집에서 50억원의 돈이 나왔으니, 큐레이터의 학력 위조 사건이 한 재벌의 문제를 새삼스레 불거지게 한 셈이다.

“그러고 보니 왜 한국 재벌 사모님들 중엔 미술관 관장이 많을까?” 신정아 관련 뉴스가 한 재벌 부인의 뭉칫돈 의혹으로까지 번지자 나온 질문이다.

사실 부호(富豪)의 부인들이 미술관 건립에 관심을 두는 것은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뉴욕의 문화적 상징이자 현대미술을 주도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관인 뉴욕현대미술관(MoMA·The Museum of Modern Art)은 부호의 부인들이 남편 몰래 수집한 미술품에서 태어난 미술관이다.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석유왕’ 존 록펠러의 부인인 애비 록펠러다. 록펠러 집안은 미술관 건립을 위해 맨해튼의 중심인 53번가에 부지를 제공하고 미술관 건설비는 물론 거액의 운영 기금까지 기부했다. 네덜란드의 오테를로에 위치한 크뢸러 뮐러 미술관도 남편의 경제적인 지원으로 미술품을 수집한 부인 크뢸러 뮐러 부인의 소장품(반 고흐의 초기 작품이 주를 이룬다)을 국가가 기증 받은 후, 그 작품을 보관·전시하기 위해 설립한 미술관이다.

한국의 재벌 총수 부인들이 미술관 설립과 운영에 관심을 두는 것은 이런 외국의 사례와 무관하지 않다. 성공한 기업인들이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을 통해서 기업의 공적인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시작됐다고도 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기업들이 설립·운영하는 미술관은 국가의 경제규모나 국내 기업의 힘에 비하면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재벌가에서 설립·운영하고 있는 미술관은 이번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성곡미술관 외에 삼성가의 ‘리움’ ‘호암미술관’ ‘로댕갤러리’ ‘삼성어린이 미술관’, SK그룹이 워커힐 미술관을 계승해서 건립한 ‘아트센터 나비’, 금호 아시아나가 설립한 ‘금호미술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부인인 정희자 씨가 설립해서 운영 중인 ‘아트센터 선재’ 정도가 전부다. 얼핏 많은 것 같지만 따져보면 얼마 안 되는 숫자다.

일부에서는 기업이 탈세나 절세의 수단으로 미술관을 운영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오해다. 미술관을 설립하고 제대로 운영하는데 들어가는 경비를 생각하면 미술관을 접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재벌 미술관이 이런 오해를 사는 이유는 재벌들이 미술관을 형식적으로 운영하기 때문이다.

삼성의 ‘리움’과 SK의 ‘아트센터 나비’를 제외하면 나머지 미술관은 적극적으로 운영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미술관다운 미술관’으로서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 못한 현실이다. 유독 리움만이 한국의 미술관 문화를 상징하는 자존심 같은 곳으로 발군의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SK그룹의 아트센터 나비의 경우 미디어 아트라는 특정한 장르를 다루는데 천착해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술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과 목적은 ‘미술품의 수집과 보존’이다. 그러나 국내 재벌가 미술관중 연간 적정량의 작품을 수집하는 미술관은 1~2곳에 불과하다. 그 중 미술관의 연구와 조사기능을 수행할 전문인력인 큐레이터와 작품을 관리하는 레지스트라, 그리고 작품을 수복하고 보존하는 콘서베이터 등 전문 인력을 제대로 확보한 곳은 리움뿐이다. 이렇게 찬찬히 따져 보면 이야기만 무성하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형국이다.

한때 재벌가 총수 부인이나 딸들이 운영하는 미술관이나 화랑 또는 아트센터가 유행했던 이유는 재벌가의 경제적 성공을 확인하기 위한 자기만족적인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벌가 며느리나 여성들이 기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할 때 이를 막기 위해 미술관이나 아트센터를 설립해서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또 재벌 그룹에 소속된 건설사가 시공하는 건축물에 조형물을 납품하기 위한 미술관이나 부설연구소를 두는 경우도 있다. 성곡미술관도 내부에 성곡조형연구소를 둬 이런 일을 하게 했다.

국내 재벌가 미술관은 공적이어야 할 미술관 운영이 재벌가의 사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어 문제가 된다. 한국의 재벌가 미술관의 경우 대기업 총수의 부인이나 며느리들이 미술관 설립만이 아니라 운영까지 맡는 특징이 있다. 이는 미술관의 기본인 공공성과 비영리성의 원칙을 무시한 것으로, 재벌가의 소유욕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미술관이라는 공적 기구를 명확하게 사회에 기부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뉴욕현대미술관이 세계 미술을 선도하는 미술관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소유와 경영이 완벽하게 분리됐기 때문이다. 뉴욕현대미술관을 설립한 부인들은 알프레드 바라는 전문가를 초대관장으로 뽑았다. 알프레드 바는 오늘날 뉴욕현대미술관의 초석을 놓은 사람으로 손꼽힌다.

미술관을 설립했다면 그 운영은 미술사나 관련 학문을 공부한 전문가에게 일임을 해야 한다. SK 최종현 전 회장의 부인이자 워커힐 미술관의 관장이었던 고(故) 박계희 여사는 미술관 설립을 위해 미술사 공부를 했고, 개관과 함께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을 관장으로 모셨다. 덕분에 워커힐 미술관은 80년대 미술문화의 꽃을 피워 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