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고문

예로부터 집안이 평온하고 화목해야 밖에 나가서 일 잘하고 행세한다고 했다. 시끄럽고 서로 반목하는 속칭 ‘콩가루 집안’을 두고서는 밖에서 ‘큰일’을 할 수 없다는 교훈이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집단이 부정하고 부패해서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고,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반목하고 갈등하는 사회를 조성해 놓고는 밖에 나가 제대로 대접받을 수 없고 제대로 행세할 수도 없다. 그런 나라의 외교가 잘될 턱이 없다.

오는 10월 초 노무현 대통령의 평양행(行)을 바라보는 많은 국민들의 심정이 그럴 것이다. 실질적 임기는 이제 석 달도 안 남은 데다 최측근 비서들이 이런저런 ‘더러운’ 사연으로 사직당국의 철퇴를 맞고 있는 대통령, 자신이 관장하는 여당도 없고 명색이 있다고는 해도 그 역시 지리멸렬하기는 마찬가지인 정치적 불임(不妊) 상태의 대통령, 그런 대통령이 떵떵거리며 평양 행차에 나서는 것을 보는 심경은 차라리 연민에 가깝다.

그가 평양엘 가서 오랜 독재로 훈련된 자신만만한(?) 사람과 어떻게 대좌할 것인가, 한국의 대표로서 당당히 할 말은 하고 거절할 것은 거절할 배짱은 있을 것인가, 더 나아가 명실상부한 한국의 지도자로서 한국의 안전과 평화를 지켜내는 보루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국민들은 그것이 불안하고 염려스럽다.

불행히도 그는 이미 진작부터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발언을 서슴지 않아 왔다. 이번 회담에서 제1 의제가 당연히 북핵 완전폐기여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에 대해 “어떻게 한번 시빗거리 만들어 보겠다고 하는” 발상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는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서 북핵을 말하라는 것은 가급적 싸움하라는 얘기다”라고까지 말했다. 국민과 국가의 안위를 책임진 사람의 발언으로서는 너무 사리(事理)가 없다.

그는 회담의 주제로 ‘평화’를 강조했다. 평화정착, 평화협정, 평화선언 등 ‘평화’ 일색이다. 물론 평화는 분쟁덩어리 세계에서 모든 것을 초월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평화는 단순히 말이나 협정으로, 또는 선언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화가 말로, 문서로, 선언으로 달성됐다면 이 세상에 세계대전은 물론 어떤 분쟁도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 평화는 평화를 보장하는 구체적 조처, 실질적 장치가 수반할 때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다. 한반도에 있어 평화를 보장하는 장치나 수단은 궁극적으로 비핵화에 있다. 단지 선언으로서의 비핵화가 아니라 핵에 관한 모든 것(무기, 프로그램, 원자로)을 완전히 폐기하는 명실상부한 비핵화를 말한다.

따라서 남북한 정상이 평화를 말하려면 당연히 북핵 완전폐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평화협정이고 선언이고는 그 다음의 문제다. 노 대통령은 그 순서를 뒤바꾸고 있거나 하나에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북핵문제를 말썽을 일으키는 ‘시빗거리’로 치부하는 사람이 남쪽의 대표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생명이 걸린 문제가 어떻게 시빗거리일 수 있는가? 달리 보면 아주 중요한 시빗거리다. 문제는 노 대통령의 머릿속에 시빗거리는 말썽거리라는 인식이 깔려 있고, 북측이 꺼리는 의제는 모두 말썽거리로 본다는 데 있다.

그는 또 “김정일과 싸우라는 얘기냐”고 했는데 싸울 일이 있으면 싸우는 것이 당연하다. 싸운다고 반드시 외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사리를 설명할 것은 하고 또 국민의 대표로서 국민의 뜻을 간곡하게 얘기하는 것도 굳이 싸움에 속한다면 싸울 수밖에 없다. 세계무대에서는 다른 나라 지도자와 잘도 싸우는 사람이 왜 김정일 앞에서는 그렇게 얌전해지려고 하는가?

노 대통령은 거기서 멈출 것 같지 않다. 그의 참모들은 서해의 NLL을 적당히 얼버무리는 식의 양보를 하기로 작정한 것 같다. 말이 “북측이 요청하면…”이지 실은 아리랑축전인가 뭔가 하는 북한의 체제선전극도 관람할 모양이다. 어쩌면 그는 평양에 가서 우리가 설마 했던 일도 서슴지 않을는지도 몰라서 불안하다. 그가 국내에서 해온 예측불허의 행보와 좌충우돌식 발언으로 미루어 보면 그는 어쩌면 북측이 제공하는 무대에 선뜻 올라 깜짝 이벤트를 만들려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런 것을 자신의 장기로 아는 사고(思考)가 발동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문제는 평양회담 이후 우리는 그가 대못질한 대로, 어음을 발행한 대로 속수무책으로 끌려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가 북측과 어떤 대화를 하고 거기서 어떤 행동을 하고 와도, 또 어떤 합의를 하고 와도 우리는 그가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무조건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100일 뒤 선거가 그 여부를 결정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