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아서 아이가 자폐를 앓게 되는 건 아닙니다. 자폐는 태어날 때부터 뇌에 이상이 있는 병일 뿐이지요. 그런데도 자폐아를 둔 많은 한국 부모들이 ‘다 내 잘못이다’라며 지나치게 자책하는 게 안타까워요.” ‘자폐’의 문제를 인류학적으로 파고들어 미국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조지워싱턴대 인류학과 리처드 그린커(R Richard Grinker·45) 교수가 방한했다.

그는 한때 북한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인류학자지만 자신의 큰딸이 자폐를 앓자 자신의 인류학 연구 테마를 ‘자폐’로 바꿨다. 그러고는 왜 자폐환자가 급증하며, 서로 다른 문화권에선 자폐를 어떻게 보는지를 분석한 것.

그가 자폐를 앓는 딸을 키운 경험까지 담아 지난 2월 미국에서 발간한 ‘낯설지 않은 그들’(Unstrange Minds)이라는 책은 석 달 만에 1만5000부 이상 팔렸고, 전문 과학 잡지 ‘네이처’와 대중 잡지 ‘피플’지에도 소개됐다. 덕분에 요즘은 미국 전역을 돌며 자폐에 관한 강연을 하느라 바쁘다.

덕영재단이 주최하는 자폐스펙트럼장애(ASD)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그린커 교수는 자폐가 ‘부모 잘못’이 아닌 이상 자폐아에게 무조건 잘해준다고 호전되진 않는다고 했다. 그 대신 “늦어도 3∼5세에 진단을 받고 약물·언어·행동 치료를 받으면 훨씬 좋아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린커 교수는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고 한국을 각별히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정신과 의사인 그의 아내는 한국계 미국인이고, 두 딸 모두 한국 이름도 갖고 있다.

그가 지금 세계적인 전문가들과 함께 한국에서 자폐스펙트럼장애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인 것은 그의 한국 사랑과 무관하지 않다. ‘자폐를 말하다’라는 미국 최대 자폐 후원 재단의 연구기금을 따낸 그린커 교수는 미국 예일대 의대 소아정신과 김영신 교수, 루돌프 어린이 사회성 발달연구소 고윤주 소장과 팀을 이뤄 경기도 일산지역 30개 초등학교의 3만여 아동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정확한 자폐 진단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그린커 교수는 “비록 자폐를 앓지만 지금 내 딸은 애완견과 열대어를 키우고, 일반 학교에 다니며 첼로를 연주한다”면서 “곧 워싱턴 D.C.에 있는 국립동물원에서 자원봉사도 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린커 교수는 딸을 정상적인 다른 아이와는 절대 비교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딸의 성장을 함께 감사하고 기뻐한다고 했다. ‘자폐아를 둔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