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 논설실장

조석래(趙錫來) 전경련 회장이 선출됨으로써 한국 재계의 부끄러운 쇼가 일단 막을 내렸다. 전경련 주변에선 마무리되어 후련하다는 반응이라지만, 기업인들 중에는 뒷맛이 씁쓸하다 못해 입 밖으로 뭔가 거칠게 내뱉고 싶은 심정을 말하기도 한다.

이번 전경련 회장 선출과정은 그야말로 재계의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난 종합세트나 마찬가지였다. 상호비방, 문서살포 등 몇몇 총수들의 말과 행동은 자신들이 가장 경멸해 마지않는 정치인의 행태와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어느 인사는 전경련 회장직을 부자간 싸움에 유리하게 활용하려는 듯이 연임 운동을 했다. 마치 은퇴를 선언했다가 틈만 보이면 정계 복귀를 감행하는 노정치인들을 보는 듯했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총수들 간의 토론도 조금만 들여다 보면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인다. 경쟁 관계에 있는 그룹의 회장에게는 ‘그 나이에 벌써?’라거나,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는다. ‘영어는 잘 하지만 그 사람이 우리에게 밥 한번 제대로 산 적 있느냐’는 구실로 제외시키기도 한다.

때로는 정치인보다 훨씬 솔직하지 못한 장면까지 노출된다. 정치인이라면 ‘내가 해보겠소’라며 까놓고 나설 국면에서 오히려 다른 인물을 지목, 재계 총수가 되고 싶은 속마음을 정반대로 표현하는 위선도 나타났다.

요즘처럼 경제계의 리더십이 정말 아쉬운 때 재계의 얼굴 역할을 맡아야 할 거대그룹의 오너 총수들이 그 자리를 맡을 수 없는 것 자체가 한국 재계의 비극(悲劇) 중 비극이다. 재판에 걸렸거나 자격 시비에 올랐거나 아예 전경련에 발길을 끊은 총수들이 있을 뿐이다. 최근 10년 동안 2명의 전경련 회장은 구속됐고 3명은 약체 그룹 출신이다. 5년 전에는 노골적으로 야당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운동을 하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었다.

국민으로부터 존경 받지 못하고 회원들로부터 멀어져 가는 경제단체의 몰락 현상은 오직 전경련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상공회의소도 전임 회장이 형제간의 치사한 싸움으로 중도하차했었다. 중소기업인들 모임은 대개 정부 납품을 둘러싼 이권 다툼으로 선거판이 결딴 나곤 한다.

경제단체의 주요 임원직은 이미 퇴물 경제관료들의 노후용 전원주택 단지 정도로 변질됐다. 무역협회는 산업자원부 등의 관료 출신이 회장부터 상근 임원직을 독식해 버렸고, 나머지 단체의 핵심 임원들도 관료 출신이다. 잘해야 반관반민(半官半民)일 뿐, 순수한 민간 경제단체라고 할 곳은 없다.

물론 정부와 경제단체 간의 주종(主從) 관계를 이해할 수는 있다. 정부와 밀월관계에서 조달물자 납품권이나 공사 이권을 얻으려는 계산이 있고, 때로는 권력자에게 접근하는 파이프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 규제를 그토록 비판하면서도 정부에 의존하는 노예근성이 경제인들에게 남아있는 증거를 바로 경제단체에서 볼 수 있다.

회원 기업들은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악전고투하는 마당에 회비를 거둬가는 경제단체들은 이것저것 난립해 있다. 일부 단체는 강제 징수한 회비로 거대한 빌딩을 올리고, 사무국 임직원들은 풍족한 자금을 바탕으로 대기업 못지않은 넉넉한 직장생활을 즐기고 있어 회원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회원은 없고 사무국만 설치는 꼴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민간 경제단체인 게이단렌(經 連)의 올해 슬로건은 '희망의 나라, 일본'이다. 우리는 경제단체에 이런 큰 꿈과 미래까지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경제단체들은 대통령이 경제에 관심 있다는 증표로 오찬에 오너 총수들을 들러리 세우거나 해외순방에 기업인을 동원하는 관변(官邊) 뚜쟁이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 죽기 전에 한국을 대표하는 단체 회장을 지냈다는 기록이나 남기려는 노기업인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일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난립한 단체들끼리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계의 통합된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이런 자기혁신 없이 그저 추한 자리싸움만 보여준다면 기업인을 보는 세간의 시선이 좋아질 턱은 없다. 경제단체 근처를 얼씬거리는 기업인들이 정치인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면서 정치인을 깔볼 자격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