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 중에 큰 규모의 흑자를 내면서 신규 투자를 하지 않는 곳이 적지 않다.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우선 돈벌이가 될 만한 신종(新種)사업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게다가 망나니 같은 노조와 몇 합을 겨루고 나면 정나미가 뚝 떨어지고, 앞에선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뒤로는 헌금과 기부금을 요구하는 시민단체들, 철밥통 지키기에 골몰하는 공무원들을 겪고 나면 “내가 왜 한국에서 사업하나”하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고 한다.

게다가 노무현 정권의 언행(言行)과 각종 정책을 2년간 겪어봤다. 기업인들은 한숨과 분노의 단계를 넘어 여유 자금이 있어도 투자를 거부하는 ‘경영인 파업’ 상태에 진입해 있다. 올 들어 정부가 위기론을 부정하지 않은 채 대통령의 입에 중량감을 더한 것만으로 경기부양효과를 보고 있지만, 많은 경영인들은 보궐선거를 앞두고 언론이 정권의 장단에 맞춰 호들갑을 떠는 정도로 지금의 경기 국면을 진단하고 있을 뿐이다.

몇 조원씩 흑자를 냈거나, 아니면 수천억원씩 여유 자금이 있다고 자랑하는 기업일수록 구조조정에는 더 열심이다. 대부분의 흑자 기업들은 적자 사업을 정리하고, 덩달아 중견 사원들을 명퇴라는 이름으로 몰아내는 일에 성공했다. 이러다가는 정리해고 숫자가 늘어날수록 기업의 흑자 규모는 증가하고, 흑자 기업이 늘어날수록 실업자 숫자가 증가하는 새로운 법칙이 우리 사회를 지배할지 모른다.

사실 기업이 여유 자금을 쓸 만한 곳은 대강 정해져 있다. 조직 유지나 확장을 위해 새 사업에 투자하지 않으면 세금을 내고 사원 임금을 올려 이익을 배분할 수 있다. 이렇게 쓰다가 남는 돈을 비상용으로 쌓아두는 것이 최고의 선택일 듯하지만, 유보(留保)해 둔다고 그저 좋은 것만은 아니다.

여유 자금을 챙겨두는 데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 주주에게 배당을 더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최근 많은 흑자 대기업들이 외국인 주주들로부터 배당을 더 늘리라고 압력을 받는 현상은 앞으로 더욱 거세질 것이다. 물론 주주들의 배당 압력이 싫으면 좋은 대안(代案)은 있다. 과일음료를 생산하는 돌(Dole)푸드라는 회사처럼 여유 자금으로 아예 주식을 모두 사들여(자사주 소각·燒却) 상장마저 폐지하는 길도 있다.

하지만 기업의 잉여자금이 재투자되지 않은 채 사내유보금 형태로 무작정 고여 있게 되면 한국 경제의 경기 회복은 늦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영인의 투자 의욕은 더욱 움츠러들어 결국 자기 발등을 찍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70여년 전 민주당 루스벨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미국 대기업들은 마치 러시아 혁명군이 정권을 잡은 것처럼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했다. 기업인들에게 그는 최소한 사회주의자였고, 아무리 양보해 평가해도 반기업(反企業) 정서에 물든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유독 IBM의 총수 톰 왓슨만은 루스벨트의 불황극복 방안, 즉 뉴딜 정책을 지지했다.

왓슨은 대공황 속에서 사원을 해고하지 않았고, 오히려 신규 투자를 감행했다. 그는 연구개발 투자를 특히 늘렸다. 무모해 보이던 왓슨식 경영전략은 중견기업에 불과하던 IBM을 10년 안에 거대 기업으로 키웠다.

한국의 흑자 기업 경영인들은 신규투자를 거부하며 구조조정에만 열중하는 ‘파업’을 이제는 풀고, 왓슨과 같은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기업인들에게나, 정권 주도 세력에나, 지난 2년은 기업의 진가(眞價), 투자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소중한 세월이었다.

만약 잉여자금이 있다고 자랑하는 대기업들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반기업 정서는 오히려 더 극성을 부리고 머지않아 반동(反動)의 충격파를 맞게 될 것이다. 사원 숫자를 줄이는 경영 효율화, 잉여자금을 늘리는 이익 극대화만이 기업인이 가야할 가장 바람직한 길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량 대기업이라면 회사의 이익, 주주의 이익만을 추구하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공헌하려는 자세도 갖춰야 한다. 어느 정권 아래서든 투자와 재투자, 그리고 그 덕분에 얻어지는 일자리 창출이야말로 기업인의 숙명적인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