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이맘때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 성북동과 한남동의 재벌 회장 등의 집을 골라 강도 행각을 벌였던 범인이 이달 초 붙잡혔다. 이 범인은 1997년 범행 직후 공범인 친형이 체포되자 홍콩을 거쳐 호주로 달아났으며, 공소시효가 지난 줄 알고 국내에 들어왔다가 검거됐다.

◆부유층집 수요일 낮에만 털어

절도 등의 전과가 있는 정모(51)씨는 친형(63)과 함께 97년 7월 9일 오후 2시 고급 주택이 몰려있는 서울 성북2동 모 기업 대표의 집에 침입했다. 이들은 가정부를 묶어놓고 배척(일명 빠루)과 큰 망치로 금고를 때려 부순 뒤 현금 300만원과 다이아반지 등 1300만원 상당의 금품을 챙겼다.

일주일 뒤 정씨는 이웃한 김모씨 집에 들어가 브로치 4개 등 400만원어치를 털었다. 다시 일주일 만인 7월 23일에도 성북2동 사학재단을 운영하는 이모씨 집에 들어가 금고를 부수던 도중 가정부가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달아났다.

그러나 이들은 30일 한남동 S그룹 회장 최모씨 집에서 '큰 건'을 올렸다. 장롱 안에서 부인 소유의 다이아몬드와 진주, 비취, 금열쇠 등 보석과 달러, 수표 등 5억원대의 금품이 쏟아져 나왔던 것. 두 달여 만인 10월 8일 수요일 오후 다시 성북동에 나타난 정씨 형제는 조모씨 집에서 여행자수표 등 4540만원어치를 털었다.

이들은 전경련이 발행하는 한국재계인사록을 입수해 기업인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냈으며, 집주인의 외출이 잦은 매주 수요일 낮 시간대에 미리 전화를 해보고 가정부 혼자 있는 집을 노렸다. 검찰은 5차례 범행 외에도 여죄(餘罪)가 있는지를 의심하고 있다.

◆황당한 도주·귀국 과정

정씨의 도주와 검거 과정도 눈길을 끈다. 마지막 범행 5일 만에 친형이 체포되자 정씨는 다음날 훔친 보석 가운데 값싼 것만 추려 컵라면 용기에 담은 뒤 동대문세무서 울타리 옆에 감춰놓았다.

이어 경찰에 전화해 보석이 감춰진 장소를 '자진 신고'한 뒤 형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다. 그리고는 그날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경찰은 "정씨가 비싼 보석들은 챙겨가 홍콩에서 팔았을 것"이라고 했다.

홍콩에서 다시 호주로 달아난 정씨는 세차장 등을 운영하며 정착했다. 하지만 정씨는 한국 여권의 유효기간이 지나 호주 영주권이 나오지 않자 한국에 들어오기로 했다. 정씨는 강도죄의 공소시효(7년)가 지난 것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씨의 혐의는 여러 명이 흉기를 들고 금품을 뺏은 특수강도죄가 적용돼 공소시효가 10년이었다.

이달 초 입국해 여권을 갱신하려던 정씨는 구청측이 경찰에 문의해보라며 여권 발급을 거부하자 '당당하게' 경찰서에 확인하러 갔다가 체포됐다.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는 27일 특수강도 혐의로 정씨를 구속기소했다.

한편 먼저 붙잡힌 친형은 징역5년을 선고받고 형기를 마쳤으며, '달아난 동생이 주범'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