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 김모(32)씨는 지난해 여름 "6개월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 백혈병 판정을 받은 뒤 복용하던 항암제 글리벡에 대해 내성(耐性)이 생겼기 때문이다. 의사는 "골수이식이 유일한 방법이지만 마땅한 기증자가 없어 언제 차례가 올지 모른다"고 했다.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김씨는 요즘 매일 등산을 하며 틈틈이 부모님의 농사일도 돕고 있다. 뜻밖의 행운 때문이다. 죽음만 기다리던 그에게 담당의사는 "수퍼 글리벡이 개발돼 임상시험 중이니 찾아가보라"고 했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신약의 임상시험을 실시하고 있던 의정부성모병원에서 김씨는 전세계에 550명뿐인 대상자에 뽑혔다. 글리벡 제조사 노바티스에서 개발한 신약 '닐로티닙'을 먹은 지 두 달 만에 김씨는 중환자실에서 퇴원했다. 이제는 2주일에 한번씩 병원에 들러 약을 타온다.

김씨는 "결혼 1년 만에 암에 걸려 아기도 낳지 못한 아내에게 늘 미안했다"며 "정을 떼야 아내가 새 삶을 찾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고 일부러 쌀쌀맞게 대했는데 이런 기적이 찾아올 지 몰랐다"고 말했다.

최경숙(53)씨는 지난해 3월 유방암이 재발했다. 10년 전 수술을 받은 뒤 완치됐다고 믿었던 암은 한 번 재발하자 급속도로 전이되면서 목과 간까지 퍼졌다.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최씨는 의사로부터 "수술도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퇴원한 뒤 대체요법에 기댈 생각을 하던 최씨에게 간호사는 외국에서 개발된 신약의 임상시험 참여를 제안했다. 가족들은 "실험동물도 아니고 사람목숨을 갖고 실험을 하느냐"며 말렸지만 대안이 없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미국계 제약사인 BMS사의 '탁솔'을 쓰고 나서 10여 개월 만에 최씨의 목과 간에 전이됐던 암이 사라졌다. 급속도로 커가던 유방암도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있다. 통증도 사라지면서 최씨는 요즘 장도 보러 다니고 가벼운 운동도 가능할 정도가 됐다.

2000년 1월 GIST암(위장관기저종양) 수술을 받은 최성규(56)씨는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 암 재발 판정을 받았다. GIST란 주로 위의 근육층·위점막 아래·대장 등에 발생하는 종양으로, 위장관 내에서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므로 수술도 불가능한 경우가 많은 암이다. 6년 전 효과가 좋았던 글리벡도 이번엔 전혀 효과가 없었다. 새벽이면 통증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 "빨리 걷어가 달라"고 하늘을 원망할 뿐이었다.

글리벡에 내성이 있는 환자들에게 효과가 있는 신약이 나왔다는 소식에 최씨는 다국가 임상시험에 참여하고 있는 서울아산병원을 찾았다. 검사를 통해 적격자로 판정된 최씨는 미국계 제약사 화이자의 '수텐트'를 먹고 한 달 여 만에 통증이 사라졌다.

최씨는 "처음 암에 걸렸을 때도 임상시험을 통해 당시 한 달에 300만원씩 하던 글리벡을 공짜로 먹었다"며 "효과 좋은 신약으로 생명도 연장하고 치료비도 거의 들지 않는 임상시험에 참여할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항암제에 대한 다국가임상시험은 서울대병원, 신촌세브란스병원,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등 대형종합병원을 중심으로 전국 10여개 병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임상시험 대상은 국제적으로 동일한 치료계획서에 따라 연령·성별 등의 대상기준과 그 동안의 치료경력·사용약물·암의 단계 등 증상기준에 따라 선정된다. 모든 기준에 부합하면 임상시험 과정에서의 부작용 등을 감수한다는 서약서와 함께 등록이 이뤄진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종양내과 정현철 교수는 "임상시험 대상자가 되면 약값과 치료비가 무상으로 지원되기 때문에 10분의 1정도의 비용만으로 최신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