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에 국내 최대 抗日항일 민족운동단체였던 新幹會신간회의 창립을 기리는 기념식이 1931년 신간회 해산 이후 처음으로 서울 YMCA회관 대강당에서 열린다고 한다. 1927년 2월 15일 신간회 창립대회가 열렸던 바로 그 장소에서다. 3·1 독립운동이 암흑의 일제 치하를 밝힌 불꽃이었다면 신간회 운동은 이상재, 신채호, 한용운, 조만식, 홍명희, 김준연, 허헌 등 일제에 타협하지 않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한 배를 타고 민족의 역량을 결집한 일제 치하 독립운동의 등뼈와 같은 존재다. 이들은 정치적 이념과 독립운동의 方略방략에 대해선 견해를 달리 하면서도 조선 민족의 정치적·경제적 각성과 대동 단결, 기회주의 배격이라는 큰 뜻을 같이한 세력이었다. 신간회 발족과 거의 동시에 전국 140곳에 支會지회가 세워지고 회원이 4만명에 이르렀다는 사실만 봐도 당시의 조선 사람들이 신간회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당시 이상재 조선일보 사장이 신간회 회장을 맡은 데 이어 신석우, 안재홍, 백관수, 이승복, 한기악 등 조선일보 출신 12명이 간부와 발기인으로 나선 데서도 드러나듯이 신간회의 사실상 기관지 역할을 맡았었다. 지방의 많은 조선일보 支社지사는 신간회 지역 支會지회의 중심 구실을 떠맡았다.

현 정권의 주도세력들은 지역과 계층으로 국민들을 분열시킨 것도 모자라 親美친미와 反美반미, 親北친북과 反北반북으로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기에 抗日항일의 공동목표 아래 좌·우를 아우른 신간회의 統合통합정신은 지금 우리 사회에 더 뜻이 깊다. 신간회 운동에 앞장선 선배들이 그토록 이루고 싶어한 독립과 富國부국을 이뤄놓고도 싸움만 일삼는 오늘의 현실은 옛 선배를 쳐다볼 면목이 없게 만들 정도다. 親日친일, 親淸친청, 親露친로, 親美친미로 국론이 나뉜 끝에 亡國망국으로 치달았던 舊韓末구한말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각성을 통해 독립의 길을 닦으려 했던 것이 신간회의 정신이다. 오늘의 현실이 현실이기에 그 신간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된 지 75년 만에 창립기념식을 올린다니 여러 생각이 더욱 각별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