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하지만 20여년 전엔 초등학교에서 뜀박질을 잘하는 남학생이 가장 인기가 좋았다. 달리기 1등은 축구를 해도 1등이었다. 초등학교 축구부 감독은 잘 뛰는 어린이를 맨먼저 찍었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왕년의 축구 스타들은 뜀박질 때문에 축구화를 신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축구의 경쟁력은 역시 스피드다. 덩치가 산만한 유럽 선수들은 다람쥐같은 한국인의 스피드를 결코 따라올 수 없다. 선수로는 환갑이 훨씬 지난 나이에도 오스트리아 리그를 주름잡고 있는 서정원은 한국 축구가 자랑하는 스피드의 대명사다. 한창 때는 100m를 11초에 끊었다는 그는 요즘도 뜀박질에서 지는 일이 별로 없다.

얼마전 서정원은 10년도 훨씬 지난 비화를 털어놨다. 그가 태극마크를 처음 달았던 지난 1990년 얘기다. 태릉선수촌에서 합숙중이던 축구 대표팀의 박종환 감독은 어느날 오후 훈련을 마친 뒤 선수 5명을 따로 불렀다. 박경훈(16세 대표팀 감독), 변병주(대구 청구고 감독), 김주성(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 고정운(FC서울 수석코치), 그리고 처음 대표팀에 소집된 막내 서정원이었다.

요즘도 축구팬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이들의 공통점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준족이란 사실. 일단 별명을 들어보자. 김주성과 고정운은 각각 '야생마'와 '적토마'란 애칭이 이름석자 앞에 항상 따라붙는 반인반마형 인물. 사이드어태커로 명성을 날렸던 박경훈과 변병주도 '번개'와 '총알'이란 애칭으로 잘 알려졌다. 여기에 서정원은 '날쌘돌이'란 닉네임을 얻으며 당시 샛별로 떠올랐다.

육상 단거리 대표팀과 비교해도 뒤질 게 없는 5명이 달리기를 한다면 누가 맨먼저 테이프를 끊을까. 축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궁금중이 발동할만 했다. 박종환 감독은 솟아오르는 호기심을 끝내 참지 못했고, 이들을 골라인 뒤쪽으로 소집했다. "출발!"이란 신호와 함께 반세기가 넘는 태릉선수촌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이 펼쳐졌다.

최후의 승자는 누구였을까. 서정원은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제가 1등을 먹었죠. 대학을 다니던 제가 당시에 가장 어렸으니까요." 그럼 2등은. 그는 "1등으로 골인한 사람은 2등이 누군인지 모른다"며 선배들을 배려했다.

(스포츠조선 류성옥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