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24시간 전화기 곁을 사수하라. 언제까지? 내년 7월 둘째주 올림픽 성화가 타오를 때까지.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이 전부인 까닭이다. 1983년 11월 대한핸드볼협회는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남녀 모두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탈락했다는 비보가 전해진 탓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 팀은 1년 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중국과 두 번 만나 30―17, 33―24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바로 그 중국에 덜미를 잡히다니. 연말 이사회에서 누군가가 소련 및 동구권이 올림픽을 보이콧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세계연맹에 전화를 걸어 대타 출전 명부에 이름을 올려두자고 했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어언 6개월, 마침내 수화기 저쪽에서 ‘축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남녀 모두 출전 가능. 5월 마지막 주 금요일의 일이었다.

남자 팀은 일찌감치 메달권에서 멀어졌지만, 여자 팀은 초반 두 경기를 23―22, 29―27로 아슬아슬하게 달아나며 희망의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다. 서기가 깃든 시점은 3차전 중국과의 경기였다. 종료 47초 전까지 스코어는 22―24. 두 번의 기적 같은 가로채기와 속공, 그리고 종료 벨과 동시에 던진 김옥화의 점프 슛으로 결과는 무승부. 여섯 팀이 벌이는 풀리그에서 중간성적 2승1무라면 메달을 노릴 만했다. 다음 상대는 3전 전승의 유고였다. 이기면 금메달도 바라볼 수 있으나 진다면 4위 추락도 감수해야 하는 사실상의 결승전. 한국은 내심 자신이 있었다.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며 득점 랭킹 선두를 달리던 윤병순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 전날, 이문식 감독과 정형균 코치는 숨죽이며 이어지는 흐느낌 소리에 잠을 설친다. 코칭 스태프가 안으로 잠긴 문을 따고 들어갔을 때 윤병순은 어깨 인대가 늘어난 자리에 얼음찜질을 하며 처절한 고통을 참고 있었다. 유고전, 한국이 전반 내내 서너 점 차로 끌려가자 벤치에 앉아있던 윤병순은 결심한 듯 일어나 준비운동을 시작한다. 내보내달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체육인들에게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한 유혹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한국의 코칭스태프는 선수의 몸과 자신의 영예를 바꾸지 않는다. 계속 몸을 푸는 윤병순과 애써 그녀를 외면하는 두 남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 한국은 그 경기를 23―29로 잃었다. 경기 후 흘린 윤병순의 눈물은 패배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코칭 스태프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을까. 마지막 경기 서독전(26―17승)이 끝나고 세계연맹 사무총장 린켄버거(서독)가 한국팀을 찾아왔다. 은메달을 따줘서 고맙다. 대타출전 선정이 공정하게 이뤄졌다는 걸 그대들이 증명해줬다. 정말 축하한다. 이번에는 코칭 스태프들도 마음껏 목놓아 울어버렸다. LA 하늘 가득 울려퍼지던 대한민국 핸드볼 팀의 가슴뭉클한 진군가 한 자락.

(장원재 숭실대 문창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