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출판시장에는 오래 전부터 SF(미래과학소설)와 평전(評傳), 두
장르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이 중 평전은 최근 몇 년
사이 '체 게바라 평전' 같은 베스트셀러가 몇 권 나오면서 '비인기
종목'의 불명예를 다소 벗었지만, SF는 여전히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매트릭스' 같은 SF영화에는 열광하면서 정작 책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우리 독자들이 과학 책을 안읽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
합니다. 가령, 스티븐 호킹의 '호두껍질 속의 우주' 같은 책은 미국과
일본에서 장기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한국에서는 기대에 크게
못미쳤지요. 한국인들이 과거나 현재에 비해 미래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이같은 SF '사막'에서 듀나는 단연 '오아시스' 같은 존재입니다.
지난해 세번째 작품집 '태평양 횡단특급'(문학과지성사)를 발표한 그는
팬사이트가 있을만큼 많은 매니아를 거느리고 있지요. 문학평론가 정과리
교수(연세대)는 "'인간이후(Post·human)'에 대한 탐구로 한국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면서 "주제와 형식, 모두에서 본격적인
SF작가"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대중적 인기 못지 않게 문학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

듀나는 알려진대로 '얼굴없는 SF작가'입니다.
인터넷 주소로만 실재할 뿐, 전화조차 불가능하며 이메일로만 소통이
가능합니다. 사진 대신 뭉크의 대표작 '절규'를 자신의 이미지로
사용합니다. 듀나는 지난해 조선일보 Books에 SF컬럼을 연재했었는데,
당시 원고료 수령을 위해 통보해 온 주민등록번호는 그가 30대 초반의
여성임을 보여줍니다. 문체로 상상해 본 듀나의 모습과 어울리는
정황이긴 합니다만, 주민등록번호가 본인의 것이란 보장 또한 없지요.
듀나가 두 사람 이상의 집단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과거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에 대해서도 '운동권' 출신 시인이 대필한다느니,
공장노동자들의 집단창작이니 하는 추측이 무성했던 적이 있었지요.

"듀나가 큰 문학상을 받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부질없는
공상을 해봅니다. 상에 연연할 것 같진 않고, 혹시 상금을 받기
위해서라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싶네요. 한국 풍토에서 글쓰는
것만으론 먹고 살기 힘들테니까 말이죠. 혹시 그는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처럼 '현실의 듀나'와 '온라인상의 듀나'로 이중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