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거리에 선 문부식씨.그는 “광화문으로 사람들을 불러낸 것은 어떤 거창한 역사의식이나 이념이 아니라 슬픔의 힘 때문이 아니겠느냐 ”고 했다.<br><a href=mailto:rainman@chosun.com>/채승우기자 <

겨울 광화문에 나가보았나. 모처럼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온 너는 처음부터 대뜸 내게 그렇게 물어왔었다. 지나간 한 달 동안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던 광화문은 그렇듯 너에게 하나의 안부 인사가 되어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여 친구여, 나는 너의 그 물음이 너무 갑작스러웠고 또 얼마간은 낯설기조차 했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나의 대답은 결국 우리의 대화를 자주 끊기게 했고, 그래서 내내 어색했었지. 겨울 광화문, 그곳에 간다는 것이 우리들 각자에게 진정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또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작 말해 보지도 못한 채.

그렇다. 어쩌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다 나오는 길에 촛불을 든 시위대와 마주쳐도 나는 한 번도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네가 약간은 냉소 섞인 어투로 반문했던 것처럼, ‘왕년의 반미투사’인 나는 왜 그 촛불의 대열에 다가가 섞이지 못했던 것일까. 우리가 사는 이 나라에서만도 수십 만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고, 나라 밖의 한국인들도 곳곳에서 호응한, 그리하여 이제 어떤 하나의 적극적인 지향을 상징하는 촛불시위에 나는 왜 쉽사리 참여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한 해가 저무는 2002년 12월 31일. 그 날 나는 처음으로 그 촛불의 거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대열의 한복판에 서 있는 너를 멀리서 발견하였다. 그 날 저녁 광화문 초입의 종로는 너의 말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무수한 촛불들이 연출하는 출렁이는 불꽃바다의 장관이었다. 그리고 그 바다 위로는 크고 작은 깃발들이 펄럭이며 떠 있었지.

나는 옆 사람의 손 위에서 타고 있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저마다 손에 들고 있는 촛불들은 바람을 막는 일회용 종이컵 하나만 벗겨지면 이내 꺼져버릴 초라한 것들이었지만, 그것은 20년 전 미국문화원에 타오른 불길보다 강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을 공격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 의지의 부드럽고도 단호한 표현이므로 더 완강한 것이라 느껴졌던 것이다. 하면 친구여, 사람들을 다시 거리로 불러내어 이 거대한 촛불의 대열을 이루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두 소녀의 안타까운 죽음, 美의 일방주의…

말없던 다수들을 거리로 내몬 것은 당연

6월의 월드컵이라는 집합적 열광의 시간 속에 파묻혀 있던 한 사건이 새삼 다시 사람들을 광장과 거리로 불러낸 근저에는, 우리 안에 오래 지속되어온 어떤 심각한 불합리함에 대한 분노가 임계지점을 넘어버렸다는 사실이 분명 자리잡고 있다. 우리 안에 존재해온 이방의 강한 힘과, 완력에 가까운 그 힘이 빚어낸 모순과 비극이, 그 비극 앞에서 한없이 무력했던 우리들 자신에 대한 자기 연민이 어떤 사안을 매개로 공동의 분노로 전이되었다는 것이다.

겨울 광화문에는 한 국가 구성원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준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이유 있는 분노와 불합리한 현실의 변화를 희구하는 긍정적 충동이 자리잡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친구여, 촛불과 깃발과 구호와 함성이 뒤엉킨 광화문에서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말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복잡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가수 양희은이 그 거리에서 ‘아침이슬’을 불렀다. 미군 장갑차에 숨진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자리에 그 노래만큼 잘 어울리는 노래가 있을까. 그런데 친구여, 나는 의아했다. 그는 왜 그 자리에서 그냥 좋아하는 가수가 아니라 ‘국민가수’로 소개되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들어 촛불들 위에서 펄럭이고 있는 깃발들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거기 커다란 글씨로 ‘대한민국은 자주독립국가이다’라고 적힌 깃발을 보면서 ‘21세기, 반미의 달라진 풍경―미국이 감히 대∼한민국을 건드려?’라는 한 월간 잡지의 글 제목을 떠올렸다. 친구여, 이런 것이었는가. 두 여중생의 안타까운 죽음을 추모하고, 그 죽음에 대응하는 ‘우방의 나라’의 졸속하고 부당한 대응방식을 규탄하는 자리에서 이야기되는 민족적 자존심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는가.

나는 광화문의 언어들이 점차 불편해 지기 시작했다. 반복해서 외쳐지는 ‘살인미군 처단하라!’는 구호를 들었을 때 나는 20년 전의 나를 생각해 보았다.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른 나의 행위를 누군가 ‘살인방화’라고 했을 때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생각났던 것이다. 광화문의 언어들은 ‘사실들’을 벗어나고 있었다. 한 ‘시민연사’가 무대에 올라와 미군이 한국에 올 때는 모두 ‘살인면허증’을 받는다고 말할 때는 참으로 난감했다. 사실을 과장하거나 거기에서 벗어나 자가 발전하는 작위적인 분노는 그 자리에 사람들을 모이게 했던 슬픔과 추모와 분노와 희망의 넓이를 왜소하게 만들고,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차이와 다양함을 지우며 그저 단순성에로 매몰되게 만들어버린다.

촛불과 깃발은 분리되어 가고 있었다. 공식적인 행사가 끝나고 촛불들이 미대사관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시위대와 경찰들의 몸싸움이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그 뒤쪽에선 마이크를 든 사회자가 경찰들을 향해 거듭 외쳤다. ‘경고한다. 시민들이 다치면 그때부터 너희들을 한국 경찰이 아니라 미국 경찰로 간주하겠다.’ 전체로서의 미국(인)과 한국(인)을 대비(대립)시키는 이 단순한 언설. 이 단순성이 가려버리는 실재하는 현실의 복잡함과 우리 안의 숱한 문제들은 언제, 어떤 과정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일까. 미국에 대한 지금까지의 극단의 선망이 하루아침에 극단의 미움으로 바뀐 거리에서 이 촛불들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다시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촛불행진의 끝을 보지 못하고 나는 광화문을 떠났다.

친구여, 다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하리라. 그 날 겨울 광화문 거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우리가 본 것은 다만 추운 광장과 거리를 메운 군중의 열기였는가. 그 자리를 채운 숫자의 힘이었는가. 혹은 거리의 투쟁으로 빛나던 1980년대와의 재회였는가. 아니리라. 숫자는 분명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흩어지게 마련. 언표하지 않아도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겨울 광화문으로 처음 자신들을 호명해 낸 것은 어떤 거창한 역사 의식이나 이념적 목표가 아니라 바로 슬픔의 힘이라는 사실을. 시간은 숫자를 증발시켜도 슬픔의 힘은 축적된다. 찬바람 부는 겨울 광화문에서 우리가 진정 보고 싶었던 것은 다른 이들의 고통과 비극에 대한 공감의 넓은 폭이 인간에게 가해지는 관습적 폭력의 위험을 밀어내는 이성적 사회의 가능성이 아니었던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친구여, 누군가의 탄식처럼 깃발과 구호가 사라지고 나면 결국 피해자의 고통과 비극만 남겨질 것이 아닌가.


"살인美軍처단하라"…듣기 난감한 구호들

과장된 분노는 슬픔을 왜소하게 만들어

미선과 효순, 이 두 여중생의 죽음을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가해자나 피해자의 국적 때문이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개별성과 고유성,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함을 지닌 생명이 어처구니없이 박탈당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슬픔의 연대가 진실한 것이라면, 그것은 우선 우리들의 시선을 피해자들의 죽음의 비극이 비롯된 자리로 옮겨가게 할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거기에서 삶을 영위하는 일상이 군사작전이 동반하는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람들과 그들의 현실에 대한 관심의 부재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미국의 문제임과 동시에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비극적인 피해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방치되어 있는, 분노는 있어도 정작 위기가 발생하는 유폐된 삶의 공간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부재한 우리 자신의 현실이 거기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여, 우리가 광화문에서 소리 높여 외친 불평등한 ‘소파의 전면개정’도 그것의 긴요함과는 별개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법 체계의 합리성이 구비된다고 범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재판권이 이양되는 문제와는 별개로 방치된 공간에서 생겨나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대면하고 그에 따른 무거운 책임을 나누어 져야 할 몫은 여전히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선이와 효순이를 위해 우리가 해준 것이 아직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촛불시위를 멈출 수 없다’는 절규는 비장한 울림을 지녔지만, 미국 대통령의 직접 사과와 사고 당사자의 엄한 처벌과 ‘국가주권’의 완전한 회복으로도 두 생명의 상실을 채울 수 없는 자리는 엄연히 남는다. 친구여, 그 빈자리는 미선과 효순의 죽음과의 대면에서 오는 슬픔이 가리키는 자리이다. 일상이 전장이 되어버린 공간, 인간의 안전보장이 국가의 안정보장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공간, 또 다른 미선과 효순과 그 가족들이 살고 있는 자기 나라 안의 ‘난민’의 공간이 우리가 슬픔을 따라 나서야 할 자리이다.

겨울 광화문을 두고 ‘반미운동의 새 장이 열렸다’고 감격하는 사람들의 말에 나는 상심한다. 광화문에 모여든 다양한 빛깔의 슬픔의 연대를 일원화된 ‘광장의 정치’로 변화시키려 할 때 자발적 추모의 촛불들은 뿔뿔이 흩어져갈 것이다. 둘도 없는 소중한 목숨의 상실이 갖는 비극의 구체성이 추상화되고 그저 하나의 사건이 되어 특정한 목표를 위해 말해지는 소재가 될 때, 그리하여 죽은 두 여중생이 발생해서는 안 되었을 불행한 사고의 피해자가 아니라 ‘민족의 유린’을 상징하는 ‘순결한 희생자’라는 문법으로 이야기되기 시작할 때 광화문은 ‘동원된 슬픔’의 장이 되어버릴 것이다.

광장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겨울 광화문이 창조한 것이 있다면 촛불의 물결을 반미의 물결로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제 돌아가야 할 일상의 자리와 그곳에서 추구되어야 할 삶의 변화일 것이다. 친구여, 돌아보면 우리들의 촛불이 필요했던 자리는 두 생명이 죽어간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의, 인도도 없는 좁은 차도 위를 걸어가던 그들의 몸 위로 아무런 경고도 없이 장갑차가 덮치려 하던 그 순간 그 자리가 아니었던가. 친구여, 광화문을 떠나면서 나는 오래 기다려왔던 나의 새로운 여행이 출발하는 자리 역시 바로 그 슬픔의 자리여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