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청풍명월 ’촬영 현장에서 흰 가발을 쓴채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최민수.그는 “맡은 캐릭터 안에 들어가기 위해선 나 자신조차 잠깐 속여서라도 그런 삶을 살아온 것같은 착각에 빠져야한다 ”고 말했다.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터프 가이' 최민수가 인조반정을 배경으로 한
무협영화 '청풍명월(淸風明月·감독 김의석)' 주연을 맡아 스크린
복귀를 준비 중이다. '조폭 마누라'에서 깜짝 카메오로,
'예스터데이'에서 조연으로 얼굴을 비쳤던 최민수는 이번 영화에서
복수심에 불타는 조선시대 검객으로 변신했다.

"여기서 연막이 바바방 터져주고 그 때 불화살이 팍 꽂히면서 시선을
빼앗아야 돼. 나이트신(night scene)이면 역광 받아서 스모그가 하얗게
나오겠지만, 데이신(day scene)이니까 신경을 더 써야한다고." "이
장면에서 한명이 수백명을 물리친다는 설정은 설득력이 약해. 우리야
애정을 갖고 보니까 못 느끼지만, 관객은 냉정하게 본다고."

10억원을 들여 육지와 섬을 연결한 춘천 '한강주교' 세트 위. 카메라
앞에서 특수효과·조명 담당자들에게 컬컬한 음성으로 의견을 토로하고
있는 사람은 감독이 아니라 최민수다. 촬영장에서 만난 최민수는
스태프들이 말을 못 붙일 정도로 진지하다. 카메라가 돌아갈 때나 멈췄을
때나, 그의 눈빛에서 뿜어나오는 카리스마는 단숨에 주변을 장악한다.

'청풍명월'의 고독한 자객 역으로 진작부터 최민수가 점찍혀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평소 승마와 검도를 즐겨온 그는 말을 타고
장검을 휘두르는 거친 액션에서 대역이 필요 없다. 홍콩에서 온
원빈(元彬) 무술감독이 "남들이 석달 걸려도 못 할 무술을 한 달도 안
돼 소화해냈다"며 경이를 표했을 정도. 볏단 네단이 단번에 베어진 채
원 위치에 그대로 얹혀 있는 거짓말 같은 검술도 최민수의 칼 끝에서
빚어진다. 취미로 총기와 검을 수집해온 그는 원수가 된 옛
친구(조재현)와 진검승부를 벌이는 장면에서 말 그대로 '진검'을
사용해 화제를 모았다.

영화 속에서 배신한 옛 친구(조재현)를 상대로 진검 승부를 벌이는 최민수(오른쪽).

"제가 주장했어요. 현장에서 가짜 칼만 들고 싸우면 분위기가
장난스러워지거든요. 진검을 들면 그 서늘한 예리함에서 실전 무도의
분위기가 느껴지죠."

최민수는 자신의 차림새 뿐 아니라, 자신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에서도
카메라와 조명, 소품을 일일이 챙긴다. "감독 영역 침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배우가 연기의 흐름을 잡으려면 연기외의
상황도 많이 알아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 저는 작품 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제가 얼마나 깊이 몰두하고 있는지 느끼질 못 해요. 시나리오에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해결될 때까지 밤에 잠을 못 자고…, 그래서 영화
한편 할 때마다 5㎏씩 빠져요."

그러나 이 불같은 집념의 사나이의 이면에는 의외로 천진한 구석이 많다.
"생각 대로 화면이 안 나오면 눈물이 나요. 어떨 땐 정말 어린애처럼
엉엉 운다니까요." 생활 속 아주 사소한 일을 겁내는 엉뚱한 면도 있다.
"전구 갈아끼우거나 동사무소 가서 서류 떼는 일 같은 걸 전혀 못 해요.
주민등록증도 12년 전에 잃어버린 뒤로 지금껏 없이 살잖아요."

일곱살짜리 아들과 16개월된 딸을 둔 최민수는 충무로에서 손꼽히는
가정적인 남자다. 그가 아내 생일날 가족용 놀이공원 1년 회원권을
선물했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 스스로도 "배우 최민수와 평상복을
입은 최민수는 전혀 다른 인간"이라고 말한다. "촬영 없을 땐 애들이랑
나가 노는 게 제일 좋다"는 그의 표정에서 진심이 들여다 보인다.

그러나 관객이 보는 최민수의 이미지는 자식 키우는 평범한 소시민과는
거리가 있다. 어쩌면 너무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보통 사람' 역할은
평생 못 해보지 않을까. 그런데 정작 본인은 "정말 하고 싶은 게 바로
그런 역"이라고 말한다. "기회가 없으면 제가 제작을 해서라도 하고
싶어요. 흑백영화 시절의 순수함이 있는 잔잔한 이야기,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는 사실 그런 거에요."

아무래도 그의 내부엔 서로 다른 두 인간이 교차점 없이 공존하는 것
같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아들의 손을 잡고 유람선에 오르는 그는 언제
창검을 휘둘렀냐는 듯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