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서해갑문 제방으로 위 그림의 왼편에 있는 구조물 구간이다.사진 왼편이 서해바다고 오른편이 대동강 쪽이다.끌쌀뿌리 쪽에서 찍은 이 사진 아래 부분은 끌쌀뿌리 쪽에 맞닿은 1호 갑실이고 중간 부분에 제방을 길게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 2호 갑실과 3호 갑실이다.위 부분에 피도가 보인다.

『평양의 대동강변 숭어국집엔 숭어가 없다.』

북한이 1986년 평양의 수해(水害) 방지를 위해 대동강 어귀에 서해갑문을
건설한 이후 생겨난 변화상 중 하나다. 서해갑문이 강물의 자연스런
흐름을 막아 대동강 수질이 나빠지면서 맑은 물에서나 잡히는 숭어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평양 시내를 가로지르는 대동강의 푸른 강물을
보려면 주체사상탑 위쪽인 옥류교쯤 가야만 한다.

서해갑문은 북한 정권수립 이후 최대의 대토목공사로 평가받고 있다.
공사비만 줄잡아 40억 달러가 소요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초
남포갑문으로 불렸던 서해갑문은 남포 영남리와 황해남도 은율군 피도
사이의 바다를 막은 길이 6.2㎞의 제방, 피도와 은율군 송관리 끌쌀뿌리
사이의 바다를 막은 길이 1.8㎞의 제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후자의 경우
5000t급, 2만t급, 5만t급의 선박이 각각 드나드는 1호, 2호, 3호 갑실과
37개의 호형(활모양) 수문이 설치돼 있다.

북한이 서해갑문을 건설하게 된 것은 1967년 8월 대홍수로 평양이 큰
물난리를 겪으면서부터였다. 당시 폭우로 불어난 물이 바다로 내려가야
하는데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서해에서 밀물이 들어오면서 강물이 역류해
평양시를 덮치자 밀물을 막으면서 강물을 바다로 내보낼 수 있는 갑문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말에
갑문건설 계획이 수립돼 1981년 5월 착공에 들어갔다. 공사는
인민무력부가 맡았는데 동원된 병력만 20여만 명, 4~5개 군단 규모에
달했다. 김수영씨는 『당시 남포시는 공사에 동원된 군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했다.

서해갑문은 최저 갈수기(渴水期)에도 초당 100t이나 되는 강물을 바다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발전소를 건설해도 충분하다. 갑문건설에 참여했던
건축기사 출신 김호철(가명)씨는 『시공될 때부터 발전소 설계도도 함께
준비됐으나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5년 안에 완공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맞춰 완공을 서두르면서 발전소건설 계획이 백지화됐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이 와서 「발전(發電)도 하느냐」고
물으면 북한 안내원들은 「그렇다」고 대답하도록 교육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해갑문은 대동강의 범람을 막고 주변 농촌에 안정적으로 농업용수를
공급한다는 점에서 일단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 평안도와 황해남도를
직접 연결해 물류비 감축 효과를 가져온 것도 갑문건설이 가져다준
결실이다.

그러나 서해갑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만만찮게 거론되고 있다. 가장
심각하게 제기되는 것은 부실공사로 인한 갑문 붕괴에 대한 우려이다.
당시 공사과정에서 지나치게 완공을 서둔 탓에 흙으로 쌓은 제방을
제대로 다지지 않은 채 그 위에 콘크리트 작업을 해 제방이 침하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김수영씨는 『지난 90년대 말에 이미 서해갑문
제방이 침하한다는 얘기가 돌았다』고 했다. 김호철씨는 『더 큰 문제는
바다쪽 갑문 밑부분이 조류 현상으로 인해 패어나가고 있어 이를 시급히
보완하지 않으면 자칫 제방이 무너질 수도 있다』며 『지난 91년에 이미
6~7m가 패인 것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여기에 대동강 상류에서
끊임없이 토사가 내려와 쌓이면서 하상이 높아지고 있어 갑문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