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타오 박사는 "일제 치하 식량징발로 북베트남에서만 200만명이 굶어죽었는데, ''해방군''이 웬말이냐"며 고개를 저었다.<br><a href=mailto:gibong@chosun.com>/전기병기자 <

## 반 타오 전 베트남역사연구원장…日 식량징발로 200만 아사 ##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파문이 한·일간의 갈등에서 벗어나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주말 중앙대에서 열리는 학술회의 참석차 방한한 반
타오(75) 전 베트남역사연구원 원장은 17일 "일본군이 진주한
1944년말부터 1945년초 6개월만에 북베트남에서만 200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며 "일본군의 진출이 동남아국가가 서구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는 계기가 됐다는 일부 일본 교과서의 기술은 허구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1960년 모스크바 로모노소프 대학에서 베트남 현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반타오 원장은 베트남 최고 학술연구기관인 베트남
역사연구원 원장을 10여년간 지낸 학계 원로다. 1945년 일본군을 몰아낸
'8월혁명' 당시 베트남 독립동맹(약칭 월맹) 일원으로
항일선전활동에도 뛰어들었다. 1995년 그는 베트남 역사연구원에서
'1945년 베트남의 기근'이란 저서를 펴냈다.

-어떻게 해서 200만명의 아사자가 나왔나.

"44년말부터 일본은 전쟁물자 공급을 위해 수백만톤의 식량을
징발해갔다. 일본의 식량수탈은 월맹 주요 거점이던 베트남 중부
이북지역에 집중됐다. 저항의 싹을 없애버린다는 목적도 있었다. 연합국
폭격때문에 경작을 제대로 못한데다가 흉년까지 겹쳐, 식량사정이 극도로
어려웠다."

-200만명이란 수치는 어떻게 확인했나.

"북베트남 23개 지역을 현장조사했다. 지역마다 1~2달씩 머물며 유족과
관계자들을 1000명 이상을 인터뷰했다. 원래 식구는 몇명이고,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일일히 확인했다. 한 지역에서 적게는 주민의
66%부터 많게는 79%까지 몰살했다. 하노이 교외에만 수만명의 아사자가
묻힌 공동묘지가 있다.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버린 음식을 먹다가 설사로
죽거나 인육을 먹었다는 증언도 수집했다."

-베트남은 1945년3월까지 형식적으로 프랑스 비시정권 치하에
있었는데….

"일본군은 1940년 9월 베트남에 진주했지만, 프랑스는 비시정부
치하였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지배를 계속했다. 프랑스는 일본이 식량을
수탈하는 것을 방치했다. 일본 때문에 배곯는다는 소문을 퍼뜨려
베트남인들의 불만이 일본에 향하도록 한 속셈도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일본 후소샤 역사교과서는 일본의
동남아진출은 이 지역 국가들이 독립을 성취하는 계기가 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일본 점령기간중 200만명이나 굶어죽은 사건을 보면 모르겠는가.
일본이 피압박민족을 구하러 왔다는 것은 선전에 불과했다. 일부 지식인
중에는 일본이 저렇게 강하니까 그 힘을 빌려 프랑스를 물리치자는
주장도 제기했지만, 다수는 반대했다. 나도 1945년 해방자로 왔다는 일본
주장의 허구를 폭로하는 선전활동에 종사했다. 베트남에선 일본군이
진주하기전 이미 식민정부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 베트남에선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서울에 오기 직전, 베트남 인민일보에 일본의 역사왜곡은 막아야한다는
칼럼을 썼다. 1983년과 1992년 일본이나 중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한국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만나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했다. 일본이
저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 정부가 이 사건을 어떻게 다뤄야한다고 생각하나.

"일본은 1960년 고딘 디엠 정권 당시 3900만달러를 지불했다. 희생자는
북베트남에서 발생했는데, 남쪽에서 배상금을 가져갔다. 희생자
200만명중 1%에 불과한 2만명만 배상금을 지급받았을 뿐이다. 일본이
베트남의 상처를 감싸안으려면 당연히 정부차원에서 다시 배상해야한다.
학자 입장에선 우선 사실을 먼저 밝히는 게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