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헌트(38)가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다. 97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후 한동안 모습을 볼 수 없던
그가 최근 4편의 영화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등장, 전성시대를
선언한다.
13일 개봉하는 '왓 위민 원트'에서 그는 남성우월론자인 멜
깁슨을 자상한 남자로 변화시키는 전문직 여성 역을 훌륭히 해냈다.
2월초 개봉할 '캐스트 어웨이'에서는 비행기 사고로 실종된 애인을
기다리다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비련의 여인이 됐고,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Pay It Forward)에서는 알콜중독 증세가 있지만 모성애가 강한
하층 여인을 연기했다. 로버트 알트만의 '닥터 티와 여인들'(Dr.T And
The Women)에서는 육감적 프로 골퍼로 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지난 2년 반 동안 거의 일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팬들을
만나볼 수 있게 돼서 너무 기쁘네요." 최근 로스엔젤레스 포 시즌스
호텔에서 만난 그는 유머가 거의 없고 말투도 조용하다.
스스로
"내성적이라 오해 받는 일이 많다"고 밝힐 정도. 하지만 그런 성격
뒤로 드러나는 것은 고지식해 보이기까지하는 성실이었고, 연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은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신념이었다. 그는 "내성적이기 때문에
연기할 때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또 다른 내가 될 수 있으니까"라고
덧붙인다. '워터 댄스'에서 공연한 에릭 스톨츠 말대로 "할리우드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여성"의 모습이다.
헌트는 "여섯살 때 뉴욕에서 '가드 스펠'(God Spell)을 보고 연기가
내 운명이란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아홉살 때 연기 수업에 뛰어든
그는 아역 배우로 TV에서 활동했다. 86년 '페기 수 결혼하다'로 스크린
데뷔한 이렇다할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나, '트위스터' 주연으로 발탁,
뒤늦게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많은 이들이 잭 니콜슨의 편집증
연기를 명연으로 기억하지만 헌트의 연기도 결코 그 못지 않았다. '혼자
튀는' 니콜슨 스타일에 눌리지 않으면서도 '상대역을 살려주는' 그의
연기력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높다.
'왓 위민 원트' 역시 멜 깁슨의 원맨쇼같은 로맨틱 코미디이지만
그가 맘껏 스타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은 헌트가 상대역이기에
가능했다. "오스카 트로피가 일에 방해가 될까봐 서재 잘 안 보이는
곳에 뒀다"는 이 여자 배우는 자기 운명을 일찍 깨달은 자의
현명함으로,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 빛을 오래도록 발산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