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살이 될 때까지 나는 대학교수로서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쓴 글은 주로 시와 문학이론이었는데,
인간의 본능과 성을 주제로 다룬 글이 많았지만 학계 일부나 문단
일부에서 '특이한 소재로 글을 쓰는 사람'정도로 치부되었을 뿐,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학교에서 하는 내
강의시간에는 다른 대학의 학생들까지 몰려들어 큰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그래서 대학 내에서는 내가 다루고 있는 주제나 내가 하는
주장을 갖고서 찬반 논쟁이 불붙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서른여덟살이 되던 1989년 1월에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책을 내게 되었다. 문화비평과 문학비평, 그리고

일반적인 에세이와 단편소설에 몇편의 시까지 양념으로 곁들여 있는

산문집이었다. 이 책이 돌연 굉장한 화제와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나는 상당히 '특별한 삶'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에서 제일 처음 나온 성담론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자유로운 관능'의 강조와 야한 탐미주의(특히 '긴 손톱'으로 상징되는
페피시즘(fetishism)의 추구) 예찬등으로 하여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서 나서 두살 후 나는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냈고,
5월부터 '문학사상'지에 장편소설 '권태'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둘 다
'개성적인 성취향(이른바 변태성욕)'을 소재로한 작품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많은 적과 더불어 골수 애독자를 갖게 되었고, 엄숙주의와
경건주의에 길들여 있던 학계나 문화계로부터는 주로 공격만을 받게
되었다. 연세대에서 나의 1989년 2학기 전공강의를 '정지'시킨
사건(?)이 일어난 것이 한 예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내 생각을 '반성'한다거나 수정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낸 책이나 쓴 글들은 갑자기 씌어진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내
나름대로 숙성시켜 왔던 생각을 담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원군식
문화적 국수주의와 수구적 봉건윤리가 만연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후진적 의식구조를 변혁시킬 수 있는 길은 '세련되고 자유로운
성의식'고 '야한(즉 본성에 솔직한) 사고방식' 밖에는 없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그땐 젊어서 그런지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 글이 용감하게 술술
씌여져나왔다. 저서도 많이 냈고 여러 매체에다 글을 쓰고 방송에도
자주 나갔다. 그러자 내게 대한 '압력'이 점차 가시화되기 시작했는데,
이를테면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광마일기'에 경고처분을 내린
것이라든가, 방송위원회에서 방송에서의 '야한 발언'을 이유로
한국최초의 특정인에 대한 방송출연정지명령을 내린 것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나는 '민주화'가 한창 강조되던 당시의 사회분위기가 적어도
'상식'을 유지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더욱 솔직하게 글을
써나갔다. 그래서 1992년 여름에 내게된 소설이 바로 그 '즐거운
사라'이다. 나는 그때까지 사법부의 양식을 믿고 있었기에, "판금을
할테면 해봐라. 헌법소원이라도 불사하겠다"고 순진하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저항'의 결과는 나의 '전격 구속'이었다. 이른바 '외설'을
이유로 작가를 전격구속한, 한국 최초 세계 최초의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뒤 나는 학교에서도 해직되고 3심까지 가는 '종교재판'에서도
결국 져서 한국의 '문화적 촌티'에서 더욱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복권·복직이 된 지금도 여전히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즐거운 사라'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한국소설로는 최다부수가 팔렸다.
이젠 제발 '즐거운 사라'를 해금시켜 줬으면 좋겠고, 내가 별 공포심없이
글을 쓰게 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