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권 대전맹학교 교장..."생색보다 관심이 필요해요" ##.

♧ 대전시 동구 가오동에 있는 대전맹학교. 3층 짜리 건물 입구 현관
옆에는 조그만 차임벨같은 상자가 달려있다. 마치 풍경소리처럼 이 작
은 상자에서는 계속 소리가 난다.

'찌르르르 찌르르르….' 앞 못보는 맹인들에게 이곳이 현관임을 알
려주기위한 음향시설이다.

대전맹학교의 교실은 얼핏 보기에는 보통 학교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복도 양쪽으로 약간 긴 노란색 타일이
깔려 있다. 지하철 역 탑승지점에 승객들이 미끄러지지 말라고 설치해
놓은 요철형 타일과 거의 유사한 것이다. 맹인들은 복도를 걷다가 요철
발판을 밟으면 그 지점이 바로 교실 출입구임을 알게 된다.

현관을 들어서서 왼쪽으로 꺾어 요철 발판을 따라 가면 모퉁이에 임
상실험실이 나온다. 학생들이 안마와 침 등을 배우는 곳이다. 동네아줌
마들이 매일 10∼20명씩 몰려오면 학생들은 무료로 침도 놓아주고, 안
마도 해준다.

학교에 신청해 기록만 해두면 공짜로 와서 치료를 받는다.

실습이라고는 하지만 안마 실력은 상당 수준이다. 안마전문 교사인
김두선씨는 안마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7년간 일본에서 안마를 유학하
고 온 전문가이다. 주민들은 30분 정도 실습생으로부터 안마를 받은 뒤
찜질도 하고침도 맞고 간다. 치료비는 무료.

그 옆은 점자인쇄소이다. 점자 컴퓨터로 컴퓨터 교재, 영어책, 찬송
가 등을 찍어낸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오목볼록한 금속판을 찍어 눌러
점자책을 인쇄했다. 하지만 요즘은 한시간에 1600페이지를 인쇄할수 있
는 6000만원짜리 고성능 인쇄기를 독일에서 들여다 놓았다.

2층으로 올라가자 한 교실에서는 고등학생들이 비디오를 통해 내셔
널 지오그래픽 필름을 틀어놓고 동물들의 생태를 보고 있다. 두꺼운 안
경을 쓴 대여섯명의 학생들은 텔레비전 코앞으로 의자를 바싹 갖다놓고
본다. 나머지 예닐곱 학생들은 자기 의자에 앉아 있다.

"약시인 학생들은 이렇게 가까이 와서야 보입니다. 전혀 안보이는 아
이들은 자기 자리에서 소리만 듣지요"라고 담당교사는 설명했다.

또 다른 교실에서는 중학생들이 점자책으로 한창 영어공부를 하고 있
다. 9년 전부터 맹학교를 다닌다는 김수정양은 "우리 학교는 시설이 너
무 좋다"면서 "교사가 되는 것이 나의 꿈"이라고 말했다.

대전맹학교는 1953년에 설립됐으니 46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하지만
이 학교는 지난 1991년 부임한 송권(61)교장 때부터 급격히 좋아졌다.

그 자신도 시각장애인인 송 교장은 모든 일에 자신감이 넘친다. "한국
최고의 맹학교를 만들었다"고 호탕하게 큰 소리를 친다.

어떻게 변했느냐고 물으면 "왕겨를 때던 난방을 중앙난방식으로 바
꿨지, 컴퓨터도 들여놓았지, 학교에 2대뿐이던 전화를 늘려 교실마다
설치했지, 전공과를 설치했지… ".

송 교장의 자랑은 끝이 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자기의 치적을 자랑하
려는 마음보다 맹인들을 위해 봉사했다는 뿌듯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하려고 하면 안되는 일이 없었어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자신감과 명랑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어제보다 항상 오늘이 새롭
고 좋은 날이다'고 한다. 그러면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가? "맹
학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기자선생이 왔으니 좋은 날"이라고 한다.

송권 교장은 명지대 송자 총장이 품에 안고 키우다시피한 바로 아래
동생이다. 충남 대덕군 진잠면에서 은진 송씨 문충공파 16대 손 송영구
씨의 7남1녀중 3남으로 1939년 태어났다. 송 교장이 시각장애인으로 태
어난 것은 아니다. 3살 때 독한 약을 먹은 어머니의 젖을 빨은 것이 원
인이 돼 실명하고 말았다.

그의 인생이 극적으로 변화를 겪은 것은 1951년 여름. 한 시각장애인
어른이 나무작대기를 짚고 그가 사는 동네로 밥을 얻어먹기 위해 들어
왔다. 아이들이 불쌍한 사람을 안내하려 하자 오히려 동네 어른들이 방
해를 하는 것이 아닌가. '눈이 먼 것은 전생에서 죄를 많이 지었기 때
문이다. 그 죄값으로 태어났으니 고생하며 살아야 한다' '따라서 길을
인도하는 것은 신의 섭리에 역행하는 것'이라며 업보를 주장한 것.

어린 송권은 밤을 설쳐가며 괴로워했다. 그해 또 한번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왔다. 동네에 '왕중왕'이란 영화가 상영되자 송권은 영
화를 보러갔다. 아니 보러갔다기보다 들으러 갔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
이겠지만. 영화 도중에 '저가 맹인이 된 것은 부모의 죄도 아니요 자신
의 죄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함이라'는 대사가 귓
속을 맴돌았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54년 대전에 맹인학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점자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 "점자를 읽고
쓰는데 서툴기는 해도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그는 회상했다.

이어 그는 57년 서울맹학교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공부에 들
어갔다. 63년 대학입학시험을 보며 학비가 적게 드는 충남대학교에 입
학하려 했으나 눈먼 사람은 받아줄 수 없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는
12일 동안 총장실을 찾아다니며 농성을 벌였다. 하지만 원하는 법과는
퇴짜를 맞고 대신철학과에 입학했다.

학교 생활은 엄청나게 힘들었다. 동양철학을 하려면 논어 맹자 등 한
문 공부가 필요한데 한자 점자는 없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밤 10시까
지 공부에 매달리고, 새벽 2시까지는 피리를 불면서 여관 골목들을 누
볐다. 안마를 해주고 번 돈으로 그는 생활비와 학비를 댔다.

하루는 난간없는 다리를 지나다 2m 아래로 떨어져 꼬리뼈를 다쳐 큰
고생을 했다. 지금도 후유증이 남아있다. 상체를 지나치게 꼿꼿이 세워
처음 본사람들은 오해할 정도이다.

당시 미국 유학중이던 송자 총장의 부인은 병원에서 미국인들의 야간
당직을 대신 해주고 받은 돈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는 "나는 형과 형
수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대학 졸업 후 서울맹학교 교사로 일하던 그는 91년 2대 대전맹학교
교장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대전맹학교는 서울맹학교에 비해 시설이 많
이 뒤떨어졌다. 한국에서 제일 좋은 시각장애인 학교를 만들겠다는 그
의 열망은 하나씩 결실을 이뤘다. 시각장애인용 교과서 개발, 급식후원
회결성, 국내 최초로 직업교육 심화 과정인 전공과 설치, 학점은행제
실시, 밴드부 결성 등이다.

현재 대전맹학교에는 120여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 초·중·고등
학교에 전공과까지 있다. 3년제인 전공과는 말하자면 전문대학 과정으
로 볼 수 있다. 하지만 140학점을 따면 학사학위를 받을 수도 있다. 지
난해 전공과에서 첫 졸업생 9명이 나왔다. 92년에는 이 학교 유석종군
이 전국학생과학발명품 경진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송 교장은 지난해 12월 한국전력과 MBC방송이 공동주최하는 '98 좋은
한국인 대상'도 받았다. 그때 받은 상금 500만원도 학교에 점자프린터
를 마련하는데 보탰을 정도로 학교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장애자의 발전은 주위 사람들의 관심도에 정비례한다"는 송 권교장
은 매일 기도로 시각장애인을 어떻게 도울까를 간구하지만, 정작 장애
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태도에는 비판적이다.

"사회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편견도 줄어 택시 타기도 쉬워지고 편의
시설도 확충되고 있지만, 유독 변하지 않은 곳이 교회"라고 말한다. 성
직자가 장애인을 교회로 인도하면 교인들이 장애자들을 끌어들이지 말
라고 전화하기도 한다는 것. 적지 않은 교인들이 2, 3만원씩 들고와 생
색 내기를 좋아하면서도, 개인적인 후원보다 학교에 기부금을 내달라고
요청하면 손을 내젓는다고 말했다.

"학생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기르고 싶지, 절대로 비렁뱅이처럼 기르
고 싶지 않다"는 송권 교장은 학생들에게 자립심을 심어주고 명랑하고
진실되게 자라도록 항상 강조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