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외교 일선을 뛰는 우리 외교관들에게 일본 외무성내 '코리안
스쿨(Korean School)'의 대표주자를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무토
마사토시(50) 외무참사관을 꼽는다. '코리안 스쿨'의 일원이 되려면
몇가지 자격요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한국 현지 어학연수 경험이고,
둘째는 한반도 관련 업무를 수회에 걸쳐 담당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

그는 두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외무성내 60여명의 '코리안 스쿨'
중 최고참(직책상)이다. 그는 연세어학당에서 1년간 한국말 공부를
했고, 연수를 포함해 3차례에 걸친 한국 근무와 북동아시아 과장 등
한반도 관련 업무를 일관되게 '전공'해왔다.

"한국이 일본의 이웃으로 갈수록 더 중요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자원했습니다.".

72년 외무성에 입성한 그는 한국말이 가능한 외교관을 본격 육성
한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75년 한국땅을 처음 밟았다. 하지만 그가
한국을 '인생의 동반자'로 택한 계기는 그보다 앞선 72년 '7·4 남
북공동성명'이었다. 당시 외교관 초년병이던 그는 자기 일처럼 가슴
이 울렁거렸다. 폭탄의 뇌관으로 비유되던 불안정한 남북관계를 청
산하고 동북아 안정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역사적 사건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한반도에 대한 관심과 애
정을 키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 후 2년간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아시아 문제를 연구한 뒤 75
년 연세어학당에서 어학연수를 시작했다. 말 공부가 생각처럼 녹녹
하진 않았지만, 연수기간중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 외교관, 대학생,
교수에서 하숙집 주인까지 한국인들과 폭넓게 어울렸다. "한번 가슴
을 열면 굉장히 깊숙히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게 그가 체험
한 한국인론이다.

그는 70년대 한국을 "삶의 의지와 활기가 넘치는 나라"로 기억하
고 있다.

개인소득 1천달러에 1억달러 수출 달성을 위해 뛰던 때였다. 당
시 현대 포니가 막 수출되기 시작했다. 특히 그에게 감명을 준 것은
새마을운동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그
는 '국민에게 목표를 설정해준 지도자'라고 답했다. 그는 박 대통령
을 '낡은 폐습을 부수고 국민적 역량을 경제발전에 결집시킨 지도자'
로 평가하면서 "정치적 억압에 맞서 투쟁한 사람들은 독재자라고 말
하겠지만 역사의 평가는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외교관들이 다 그렇지만 한반도를 담당하는 북동아 과장 시절은
특히 일복이 터진 때였다. 한일 무역적자 시정, 일북 국교정상화 추
진, 일본군 위안부, 북방영토내 한국어선 조업문제, 북한 핵개발 등
이른바 '5대 과제'와의 씨름으로 날이 새고 졌다. 하지만 그는 "태
어날 때부터 팔자가 한국과의인연"이라고 말한다. 한일국교 정상화
가 이루어진 날짜(65년12월18일)와 자신의 생일(48년12월18일)이 한
날짜이니 이것도 보통 인연이 아니다.

그에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자 '한국은 인재가
풍부하고 발전 잠재력을 가진 나라'라는 스노베 전 주한대사의 말을
소개하며 "적극 동감한다"고 했다. 그는 '가깝고도 먼' 한일관계를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파트너십으로 만들기 위해선 "가해자와 피해
자의 입장차를 이해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면서 "한일관계는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중장기적 곡선이 상승세를 유지하도록 미래
지향적으로 접근해나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약력.

-- 48년 출생
-- 72년 요코하마 국립대학 경제학부 졸업후 외무성
-- 84년 유엔 일본정부 대표 1등 서기관
-- 87년 주한 일본대사관 참사관
-- 89년 외무대신 관방 영사 이주부 여권기획관 및 외국인과장
-- 91.11∼93.5 아시아국 북동아시아과장
-- 93년 주한 일본대사관 공사
-- 96년 주영 일본대사관 공사
-- 98년 외무참사관 겸 문화교류부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