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박정희에서 고목정웅으로 ##.

1940년 7월 여름 박정희를 비롯한 만주군관 2기생도들은 대련으로

해양훈련을 받으러 갔다. 2주간 수영과 조정훈련을 했다. 만주군관학

교를 이끌고 있던 일본인 장교들의 안전의식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

들은 총검술 훈련을 할 때도 반드시 5m 간격을 유지하도록 하더니 여

기서는 모든 생도들의 수영실력을 측정한 다음 이마에다가 등급표시

를 했다. 그리고는 바다에 줄을 쳐서 실력대로 수영을 하도록 했다.

무등급자는 허리 이하의 수심에서만 수영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3

주간의 여름방학. 박정희는 구미에 들렀어도 아내와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에는 잘 가지 않고 무서운 형 상희의 눈을 피해서 친구들 하

고만 어울려 다녔다. 박정희의 첫 결혼이 단란하였더라면 그가 아내

와 헤어져 만주로 가는 결단을 내릴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박

정희는 신경으로 돌아갈 때는 문경에 들렀다. 옛 하숙집에 머물면서

제자들과 재회하여 놀다가 떠났다.

1940년 여름 민족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시킨 일제는 창씨
개명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만주군관학교에서도 이해 가을에 조선인
학생들 24명(1기생 13명, 2기생 11명)을 호출하더니 1주일간의 휴가
를 주었다. 고향에 가서 창씨개명을 해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는 구미에 내려와 상희형과 의논했다. 조선일보 선산지국을 경영하던
박상희는 이 신문이 폐간된 이후에는 조선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문'
으로 옮겨 기자 겸 지국장 일을 보고 있을 때였다. 이 항일활동가도
시류를 정면으로 거스를 수는 없게 되었다. 그는 고령박씨에서 '고목'
이란 성을 취한 뒤 작명을 해주었다. 박상희는 '다카키 소기(고목상
희)',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고목정웅)', 박정희의 조카 박재석은
'다카키 이사무(고목용)'가 되었다. 박정희의 선배인 1기생 방원철은
가타야마 유이치(방산웅일)로, 박임항은 츠루야마 링고(학산임항)로
개명했다. 방원철은 누군가가 자신을 "어이! 가타야마"라고 부를 때
마다 챙피한 생각이 들었다. 오기가 강한 박정희는 더 했겠지만 그는
일단 순응하는 모범생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던 사람은 박정희의 동기생 강창선이었다. 러시아 원동지역에
살다가온 그는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청년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얼
어붙은 강을 걸어서 건너오던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가 창씨개명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줏대와 함께 너그러운 구대장을 만난 덕
분일 것이라고 동기생 김묵(육군소장 예편)은 말했다. 해방 후 이 강
창선은 박정희와 함께 육군사관학교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그 인연은 두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놓는다.

중국인 생도들은 "조선인들이 이제는 이름까지 바꾸어 왜놈이 되
었구나"하고 놀렸다. 그때 만주에서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인들을 '토귀즈(두귀자)', 조선인을
'얼귀즈(이귀자)'라고 불렀다.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의 앞잡이가 되어
중국인들을 괴롭히는 데 협력하고 있다는 뜻이 깔린 말이었다. 만주
에서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밀정, 통역, 헌병보조원으로 일하면서 중
국사람들을 괴롭힌 것은 사실이고 이 때문에 해방 뒤 보복을 당했다.

중국사람들의 눈에는 만주군관학교가 '파시스트 수용소'이자 '한
간의 후보자 양성소'로 보였을 것이다. 만주군관학교 조선인 생도들
의 사정은 더 곤혹스러웠다. 국적으로 치면 일본인이고 소위 '내선일
체'의 정신으로 본다고 해도 일본인 대우를 받아야 마땅한데 여기서
박정희 등 조선인 생도들은 만계로 분류되어 일본인 생도들이 쌀밥을
먹을 동안 수수밥을 먹고 변비로 고생하고 있었다. 중국인 생도들과
섞여서 내무반생활을 하자니 우선 말이 안통해서도 답답했다. 일본인
으로부터는 경멸을받고 중국인으로부터는 원한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
는 상황에서 '이 총으로써 누구를 위해 충성을 바쳐야 하는가'하는
본질적인 의문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박정희였다. 방원철
은 "그런 고민에 빠질 때마다 우리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나라가 있
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학교가 우리 조선의 사관학교라면 얼마나 좋
을까하는 생각을 절절이 하게 되었다"고 했다. 박정희와 동기인 일계
군관 2기생으로서 일본 미네야마(봉산)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노무
라(야촌)는 이런 말을 했다.

"박정희 생도는 이중 차별을 견뎌야 했습니다. 차별이 아니라 모
욕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5·16을 일으킨 근원을 거슬러올라가 보면
이때의 울분으로 이어지지 않을까요. 그런 울분을 안고 바라본 동덕
대의 석양과 우리가 바라본 석양은 달랐을 것입니다.".

1941년 일본군이 중국의 장사에서 패전한 적이 있었다. 그 며칠
뒤 주번을 서고 있던 정작민이란 구대장이 만계생도들을 강당으로 불
러모으더니 일본의 패전소식을 전하면서 항일연설을 하는 것이 아닌
가.

"너희들은 몽땅 혼을 일본인들에게 팔았는가. 그들이 죽으라면 죽
고 발바닥을 빨라면 빨 것인가.".

중국인 생도들은 이 웅변을 듣고는 고함을 치고 울부짖어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이 청중들 속에는 조선인 생도들고 끼여 있었다.이
소동은 그러나 보안이 유지되었다. 그때부터 중국인 생도들이 따뜻한
눈으로 조선인 생도들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 1주일 뒤 관동군 헌
병대가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최입복등 1, 2기의 중국인 생도 여러명
을 붙들어갔다. 이들은 건국대학생 수십 명과 항일비밀결사를 만들었
다가 발각이 된 것이었다.

1941년 3월에 1기생 졸업식이 있었다. 만계의 수석졸업자는 조선
인 박임항이었다. 그는 입학시험에서도 1등을 했다. 수학을 특히 잘
했다. 머릿수로는 중국인 생도의 5%에 불과한 선계는 그 뒤로도 수석
졸업의 자리를 거의 독점했다. 졸업식장에 만주국 황제 부의가 나와
서 치사를 했다. 일본군 장교가 일본어로 통역을 하는데 완전히 창작
이었다. 황제의 연설에는 들어 있지 않은 말들을 멋대로 지어내서 이
야기해버리는 것을 본 중국인, 조선인 생도들은 현실을 직시하게 되
었으리라.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