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제자들의 `기억' ##.

박정희가 3년간 교사로 재직했던 문경공립보통학교는 수안보쪽에서

문경새재(조령)를 넘어갈 때 주흘산의 산자락이 끝나는 지점에 있었다.사

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문경읍(지금은 문경시)을 내려다 보는 자리이

다. 이 학교는 1912년에 4년제로 문을 열었다가 그 12년 뒤에 6년제

로 되었다.

박정희가 부임한 다음해인 1938년에 이 학교는 '문경서부공립심상
소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이즘의 학생수는 3백20명쯤, 졸업생은 1938년
도가 53명, 이듬해에는 64명, 1940년도는 75명이었다. 교사는 교장을
포함하여 7∼10명이었다. 한 두 명은 조선인 선생이었다.

박정희는 첫해에는 3학년, 다음해에는 2학년과 5학년의 합반, 마지
막 해에는 1학년을 담임했다. 당시 문경읍의 가호수는 수백호에 지나
지 않았으므로 박정희 교사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많은 기억과 이야
기 거리를 가지고 있다.

대구사범 동창생들에게 '박정희' 하면 즉각 '나팔수'란 말이 떠오
르듯이 문경사람들에게 '박선생' 하면 '새벽나팔소리'가 연상된다.

제자 신현균은 1962년에 '지금도 아침6시 서울제일방송에서 기상나
팔소리가 들릴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간절합니다'라고 썼다('이락선비망
록'). 문경 어린이들은 귀에 못이 박힌 박선생의 나팔소리에 맞추어 노래
를 부르기도 했다.

황실광(77)할머니가 지금도 기억하는 가사--. "데데쿠루데키와 미
나미나 고로세(튀어나오는 적들은 모두모두 죽여라).".

박정희는 마을 청년들을 모아서 악단을 만든 뒤 출장공연도 했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에 "산으로 둘러싸인 문경이 답답하게 느껴졌
다"고 회고했었다. 답답한 것은 지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혼자
있기를 좋아한 박선생에게 있어서 나팔은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였다.

소년기에 이순신과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으면서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고 대구사범 시절에 그런 소질을 확인한 박정희는 교사가 되어
서는 그 꿈을 구체화시키게 된다.

박선생이 부임한 첫해, 그가 담임했던 3학년반의 급장이었던 주영
배(74·전 초등학교교장)는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박선생이 심심하
면 자신에게 "니는 임마,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물어서 되받은 것이었다.

"선생님은 그러면 이 담에 뭐가 될 낍니꺼?"
"나? 나중에 봐라. 나는 대장이 될란다. 전장에 나가서 용감히
싸워 이기는 대장이 될란다.".

"나는 대장이 될란다"는 말이 박정희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한 내력
은 오래이다. 대구사범 시절 동급생으로서 친하게 지냈던 김병희(81·
전인하대학장)가 최근에 탈고한 회고록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날 신관복도에서 이성조, 박정희와 나는 북창너머 흰 구름을
바라보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한 조선사람이 '전도다망'을 일본어로 '젠
토타보'가 아닌 '젠토타바'로 읽은 데 대해 핀잔을 주던 중이었다. 박정
희: 우리는 과연 '젠토타바'일까? 이성조: 평생 선생질이나 해야지. 운이
좋으면 군수까지는 될 수 있다더라만. 김병희: 군수가 되면 뭘해, 왜
놈의 종질이지. 그러나 저러나 조선사람은 아무리 날뛰어도 관리생활에
서는 현실이 증명하듯 도지사가 한계란다. 박정희: 나는 선생질 때려
치우고 군인이 될 거야. 김병희: 넌 나팔을 잘 부니까 군악대장이 될거
야. 박정희: 아니야, 나는 육군대장이 될 거야. 이성조: 엿장사 마음
대로? 의무연한은 어쩌고? 나는 의무연한만 채우면 선생질을 때려치우고
발명가가 될란다.'.

1959년 박정희 장군은 당시 중앙대학 교수이던 김병희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이 '젠토타바'로 시작된 학창시절의 대화를 기억해내었다. "병
희야, 우리 동기중에 니가 가장 출세했구나. 그러나 이놈아 두고보자.계
엄령만 내리면 넌 내 앞에서 꼼짝 못하겠지?".

문경의 박선생은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는 아이들을 불러모아서 학
교앞산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편을 갈라서 전쟁놀이를 시켰다. 나무 막
대기를 주워와서 총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박선생은 목검을 들고 얏얏
하면서 검도도 가르쳐 주었다.

제자 박명래(73·전 점촌초등학교 교장)는 가을운동회때 박선생이
지도하여 전쟁놀이를 단체경기로 보여준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학생들에
게 목총을 만들게 하여 실을 잡아당기면 화약이 터져서 폭음이 들리도록
했다.

박선생은 빠리빠리한 아이들은 일본군으로, 동작이 굼뜨는 아이들
은 중국군으로 편성하여 고지전을 벌이는 연출을 했다. 물론 중국군이
패퇴하는 것으로 끝났다.

6학년생 박명래는 중대장이 되어 "돌격!"하면서 달려가니 많은 부
하들이 따라주어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학예회 때도 박선생의 학급
에서는 '지원병출정'이란 제목의 연극을 했다. 각본은 박정희가 썼다. 당
시 군국주의 분위기에 호응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군은 중일전쟁을 확대시켜 대륙의 심장부로 밀려들고 있
었다. 남경과 서주가 함락되자 일제는 보통학교까지도 학생들을 모아서
축하대회를 열도록 했다. 1939년에 1학년 담임이었던 박선생은 숙직실
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숙직하는 날에는 학생들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1학년 학생들은 집에서 저녁을 먹고 놀러갔다. 박선생은 귀한 과자를
어디서 구했는지 아이들에게 나누어준다는 소문이 돌아서 과자를 얻어먹
으러 오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종기(67)는 숙직실에서 들은 박선생의 구수한 이야기를,입안에서
녹아들던 과자 맛과 함께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사람이다, 우리 글과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
을 하시면서 이순신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일본의 영웅들이 이순신 장군에게 패주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
으로도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거북선 그림을 그려가면서
실감있게 전투장면을 묘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왜놈들이 배 지붕으로
올라오면 송곳으로 찌르게 만들었다느니 물속으로 잠수까지 했다느니 하
시면서 몸짓을 해가며 연기를 하시는데 흥분 그 자체였습니다.".

독자들은 박정희가 상모리에서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구연대회때 상
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는 아리마 교장을 설득하여나팔 네 개를 구입했다. 그리고
는 박영래, 조영호, 전세호, 홍봉출을 나팔수로 뽑아 지도했다.

이들은 한 달 후부터는 조회시간에 등장하여 학생들이 조회를 끝내
고 교실로 들어갈 때 나팔소리에 발을 맞추도록 했다. 운동회나 원족때
도 나팔수들이 행진곡을 불어대어 분위기를 돋우었다.

박정희는 1939년에는 이미 만주군관학교에 시험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김순아여인의 하숙집을 나와서 학교 숙직실에서 기거하기
시작한 것도 시험공부를 할 시간도 갖게되었다.(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