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초등학교 성적표 ##.

구미 초등학교(교장 장재규)가 보관중인 박정희의 졸업원부에는 '학
업성적'과 '신체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1927년 4월1일부터 1932
년3월25일까지 매 학년마다 기록된 성적은 과목당 10점만점이 기준이다.

박정희의 성적표엔 8점 미만은 전무하다. 박정희의 동창생 박승용(82)
은 보통학교시절 성적은 항상 박정희, 김장호(사망), 김홍기(사망), 박
승용 순이었다고 말했다.

박정희 성적표에 기재된 과목은 수신, 국어(일본어), 조선어, 산술,
국사(일본역사), 지리, 이과(생물과 물리), 직업, 도화, 창가,체조, 가
사실습 등 12과목에 조행평가가 곁들여 있다. 이중 국사,지리,이과, 직
업, 가사실습은 상급학년(4학년 이상)에서만 배웠다. 이들 과목은 일본
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1931년부터 내용이 변해 군국주의적 경향을 강
하게 드러내고 조선어 사용규제와 일본어 공용 방침을 엄격하게 적용하
기 시작한다. 박정희가 졸업할 무렵부터였다.

박정희가 6년 동안 가장 성적이 나쁜 과목은 체조였다. 3학년때 8점,
나머지는 9점이었다. 체조 다음으로 저조한 과목은 창가였는데 5학년때
까지 9점만 받다가 6학년에 와서 10점 만점을 받았다. 6학년때 그의 성
적은 13개 과목 중 체조와 가사실습만 9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만점인
10점이었다.

박정희가 특히 잘한 과목은 국어(일본어)와 조선어 및 역사와 지리
였다. 5,6학년 때는 모두 10점 만점을 기록한 과목들이다. 이때가 이
순신과 나폴레옹에 심취한 시기로서 이 소년의 역사에대한 호기심이 하
나의 성격으로서 굳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6년간 그의 조행 평가는 항상 갑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고란엔 1,2,
5,6학년에 우등상을 받았다고 쓰여 있다.

학년별로 살펴볼 때 가장 성적이 나빴던 해는 3학년과 4학년 때였
다. 3학년(1928년) 때는 10점 만점을 받은 과목이 한 과목도 없고, 9점
과목이 넷, 8점이 셋이었다. 4학년이 되면서 성적은 다시 좋아지기 시
작한다.

매년 2백51일의 출석일수 중 개근한 해는 한번도 없었다. 몸이 아파
결석한 날은 1학년 때 18일, 2학년 20일, 3학년 16일, 5학년1일, 6학년
때 3일이다. 4학년 때는 사고로 9일간 결석했다고 적혀있다. 저학년이
던 시절 병결로 기록된 날 가운데 어느 하루는 늑대를 보고 집으로 되
돌아간 날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고학년으로 갈수록 병으로 결석하
는 횟수가 줄어든다.

그의 발육상태 기록을 보면 1학년 때 129.9cm이던 키가 6학년 때는
135.8cm로 6년간 겨우 5.9cm가 자랐다고 되어있다.체중은 1학년때 15.4kg
이던 것이 6학년에 와서는 30kg이 되었다. 시력과 청력 치아 등 기타
사항은 모두 정상판정을 받지만 신장, 체중 및 흉위를 합산해 발육상태
를 평가하는 개평란에는 6년 내내 '병' 판정을 받고 있다. 체조 점수가
저조한 까닭은 그의 발육부진에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성적을 셋째 형 상희와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점이 드러난
다.박상희는 박주생이란 이름으로 만 열다섯 살이던 1920년4월1일에 구
미 보통학교 2학년에 입학하여 4학년을 마치고 1923년3월24일에 졸업했
다. 당시는 4년제였다. 4학년 성적을 보면 8개 과목중 10점 만점에 9점
을 받은 과목이 수신, 조선어, 산술, 이과, 도화였고 나머지는 8점이었
다. 품행을 의미하는 조행은 을의 평점을 받았다. 3년간 병으로 결석한
날 수는 7일이고 신체발육상태는 갑이었다. 박상희는 4학년으로서 졸업
하자마자 6년제로 변한 이 학교에 5학년으로 재입학했다. 1925년에 졸
업할 때의 6학년 성적을 보면 11개 과목 중에서 조선어, 지리에서 만점
인 10점을 기록했고 체조에서 8점, 나머지 과목은 모두 9점이었다. 조
행도 갑을 받아 고학년으로 오를수록 성적이 좋아졌다. 만 20세에 졸업
한 박상희는 곧 동아일보 선산지국의 기자가 된다. 그는 향학열을 가슴
에 묻고 있다가 나이 24세이던 1929년에 대구사범에 응시하여 낙방한것
으로보인다. 1970년 무렵에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이던 김종신이 박대
통령에게 '박상희씨가 대단한 수재였다던데요'라고 하자 대통령은 다소
퉁명스럽게 "형은 대구사범 1회에 입학시험을 쳤다가 떨어졌는데 뭘"이
라고 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학적부에는 '입학 전 경력'으로서 '한문을 수학'이라고 적
혀있다. 누님 박재희에 따르면 박정희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요일에는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박정희는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갔
으니 시간을 상당히 충실하게 보내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어머니 백남
의는 막내에게 사랑채의 한 방을 공부방으로 내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나만의 공간'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박정희로 하여금 '생각을 많이 하
는 사람'으로 만드는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나만의 공간'은 사교성이
약한 인간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자립심을 키우기도 한다. 누님의 증언
에서 이 소년의 그런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정희가 검정 고무신을 신게 된 것은 5학년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사다주셨어요. 그날 밤 그것을 품에 꼭 안고 자더니 다음날 학교에 갈
때는 짚신을 신고 고무신은 학교에 가서 신는다고 들고 가더군요. 정희
는 또 아버지에게 자그마한 갈쿠리와 지게를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공
일에는 뒷산에 올라가 빨간 갈비를 끌어모아 묶음을 만들어 두어요. 그
리곤 아무도 손을 못대게 해요. 이것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어머니
한테 팔아달라고 해서 돈이 생기면 공책과 연필 따위를 사곤했습니다.".

조선총독부 농림국의 통계를 보면 1910년 우리나라 농가의 평균경작
면적은 1정보, 즉 3천 평이었다. 1936년 조사에서는 이것이 1.61정보로
늘어난다. 박정희가의 경우, 위토답으로 경작하고 있던 외가쪽 문중 소
유인 1천6백 평이 전부였다. 박정희 집안은 우리나라 평균에도 못미치
는 빈농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박정희가 5학년이던 1930년의 통계에 따
르면 전국의 농가중 박정희 집 같은 소작농이 약 45%, 자작겸 소작농이
약 31%, 자작농이 약 18%, 지주가 3.6%였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후
지주와 소작농가수는 계속 늘었고 자작농가수는 줄었다. 농촌에서는 빈
부 차이가 극심해지고 있었다. 일제는 대지주를 보호하는 정책을 썼고
일부 지주들은 친일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계급적인 모순 속에 놓인
박정희 집안에서 신학을 배우게 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사회주의운동
가의 길을 걷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군인의 꿈을 키운다.

박정희 집안은 지주와 순사로 상징되는 지배체제에 대한 반감을 가
질 수밖에 없는 가정환경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는 칠곡군의 대지주 장승원으로부터 논 다
섯마지기를 빌어 소작하고 있었다. 박무희의 장남 재석은 "할아버지(박
성빈)께서 장관찰(장승원은 대한제국 시절에 경북 관찰사였다)의 집을
출입하셨는데 그 인연으로 해서 소작을 하게 된 것이아닌가 한다"고 했
다. 당시의 소작료에 대해서 박재석은 "7(지주에게 내는 비율)대 3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장승원은 미군정 시절에 수도경찰청장으로서 공산당
소탕에 앞장 섰고 뒤에는 국무총리를지낸 장택상(작고)의 선친이다. 장
승원의 선친은 장석룡으로서 이조판서를 지냈다.

한강 이남에서는 제일 가는 지주로 불리기도 했는데 연간 7만5천석
의 소작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요사이 금액으로 환산해도 연간 1백억원
대 이상의 수입이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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