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정이 많고 섬세한 아버지는 첫 딸로 태어난 나를 무척이나 아
끼고 사랑해주셨다. 어릴적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다녔다. 아버
지는 당시 먹기에도 아까웠던 우유와 달걀로 나를 씻겨 주셨다.

목욕탕 가는 길 가게 아저씨는 내가 아버지와 함께 지나가기만 해
도 "오늘도 목욕 가시나요"하며 달걀과 우유를 챙겨줄 정도였다.

좀 더 자라 아버지가 TV에도 나오고 얼굴도 알려진 '공인'임을 깨
닫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게 큰 자랑거리였다. 친구들이 신기해 하고
부러워할 때마다 우쭐했고 아버지가 출연하던 어린이 프로그램 대본을 친
구들에게 선물하며 생색을 내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최고 자리를 지키고 계신 아버지는 언제나
나의 영원한 우상이자 으뜸가는 자랑거리다. 중학 2학년때 우리 가족
에겐 기억하고 싶지않은 시련이 닥쳤다.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었다. 어
린 나이에 큰 상처를 받은 나와 내 동생을 다독거리시느라 정작 아버지는
스스로를 추스를 여유가 없었다.

할머니가 편찮으신 날에는 아버지가 직접 내 도시락을 싸주셨다.혹
시라도 샐까 비닐랩에 두껍게 싸주신 반찬들을 하나씩 풀면서, 이른 아침
부엌 한편에서 익숙지 않은 손놀림으로 도시락을 준비했을 아버지를 생각
하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이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밖에서는 화려한 스타로 대접받는 성우 배한성이 집에 와서는 딸들
도시락도 싸고 걸레도 빨고 세탁기도 돌리며 홀아비로 지냈던 사실을 아
는 이는 많지않을 것이다. 힘들었던 몇년이지만 아버지는 엄마의 빈자
리를 훌륭하게 메워주셨다.

새해를 맞는 12월 마지막날, 온 식구가 손을 꼭 잡고 자정을 넘기
는 우리 식구들만의 의식이 있다. 어느해인가 아버지는 생방송 프로그
램 때문에 집에 올 수가 없었다. 대신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스튜디오
로 불러주셨다. 그렇게 그 해에도 따뜻한 아버지 손 안에서 새해를 맞았
다. 돌이켜보면 그때 가슴 아팠던 시간들이 남은 우리 식구를 사랑으
로 더욱 단단히 묶어주었던 것같다.

고3이 되던 해 새 엄마를 맞으면서 아버지는 비로소 1인다역의 짐
을 벗었다. 이듬해에는 우리 집 보배인 막내 민수도 태어났다. 자정
이 넘어 들어와 쓰러질 만큼 피곤하시면서도 아버지는 민수가 조르는대로
축구도 하고 수십가지 목소리로 즉석 인형극을 펼쳐보이기도 했다.

내가 직장인이 되고부터는 바쁜 아버지와 함께 하는 자리가 점점
더 줄었다. 요즘 마주치는 아버지는 전보다 부쩍 잔소리가 늘었다. 예전
만큼 품에 두시지 못해 내가 불안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
버지는 여전히 내 든든한 후원자다.

최고 자리에 계신 아버지에게 어울리는 사랑스런 딸이되기 위해서
라도, 아버지에게 받았던 무한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돌려주기위해서라도
바쁘고 열심히 살 것을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