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괴물의 탄생 ##.

역사에는 가끔 사소하게 보여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일이 지내
놓고 보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결정적인 전기였음을 알게 되는 경우
가있다.

27일 오전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계엄공고 제5호는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를 알렸다. 이 설치의 법적인 근거는 계엄법 제11조였다.

'비상계엄의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은 계엄지역내의 모든 행정
사무와 사법사무를 관장한다.'.

비상계엄은 사실상 계엄사령관에게 비상대권을 주는 것이므로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사변에 있어서의 적의 포위공격으로 인하여 사회질서
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하도록 그 요건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10·26 사건은 이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군병력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 검찰이나 경찰력으로 충분히 수사
할 수 있었던 살인사건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이날 밤 아무도 비상계
엄령 선포의 부당성을 제기하지 않았다.

계엄선포요건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고 계엄령을 펴게 되면 군부가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게 된다는 중대한 교훈을 주는 것이 10·26사건이
다.

이 계엄은 1964년 6·3사태(한-일회담반대 시위)때, 그리고 1972년
10월17일 유신선포 때 폈던 계엄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앞의 두 계엄은 박대통령이 정권을 철통같이 장악하고 있을 때였고
더구나 정보부의 권력이 막강하여 효과적으로 계엄사령부를 견제하고 있
었다.

10·26계엄은 대통령, 경호실, 정보부가 무력화된 상황에서 선포된
계엄이기 때문에 계엄사가 유일한 권력의 중심이 되게끔 되어 있었다.

보안사 법무관 박준광소령은 26일 저녁 11시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비상소집 연락을 받았다. 군복으로 갈아 입을 시간도 없어
사복 그대로 보안사로 달렸다.

대공처장 남웅종준장이 "법전을 가지고 육군본부로 가자"고 했다.

육본 입구에서 국방부에서 나오던 전두환 사령관과 만났다. 함께
육군본부 별관 1층에 있는 보안부대 사무실로 들어갔다. 전사령관은
부대장 방에 들어가더니 박소령에게 지시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데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한다. 그 기능과
조직을 만들라. 먼저 정보부 기능을 정지시켜라. 모든 정보 수사기관
에 대한 조정 감독 업무를 합수본부가 가지도록하라. 특히 정보부가
예산을 마음대로 못쓰도록 통제하라.".

이때 박소령의 머리에는 미리 들어 있는 게 있었다. 그해 여름
을지연습을 할 때 느닷없이 전사령관이 그를 부르더니 "계엄관련법에 대
해서 한번 브리핑을 해봐"라고 했다.

박소령이 조사를 해보니 합동수사본부에 대해서는 어느 법에도 규
정이 없고 국방부에 계엄 시행계획으로서 2급비밀로 분류된 '충무계획
1200'이 유지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계획에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단 한 줄의 규정이 있을 뿐이었다.

전사령관은그 보고를 받더니 "충무계획의 규정을 근거로 하여 보안
사의 의견을 종합하여 보라"고 했다.

박소령은 합동수사본부의 구성이나 기능 등에 대한 보안사의 의견
을 모아서 계획서를 만들어 갖고 있었다.

10월 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터졌을 때 박소령은 전두환사령관
을 수행하여 현지에 내려갔는데 이때 그 계획서를 가지고 갔다. 부산에
서 합동수사단을 만들어 한번 연습을 해본 셈이었다.

박소령은 이런 경험만 참고하여 이날 밤 육본 보안부대에서 합동수
사본부의 기능과 조직에 대한 기안을 했다.

그 핵심은 합동수사본부를 계엄사령관 직속으로 두고 정보부 검찰
경찰 헌병 군검찰 등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조정 감독케 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정 감독 권한은 원래 정보부가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기관을
통제하고 있었다. 전두환사령관은 이 조항에 따른통제를 정보부로부터
받아본 경험을 잊지 않고 있다가 정보부가 무력화된 틈을 타서 기민하게
이핵심적 권한을 잡아채간 것이었다.

박소령은 이 기안을 작은 보고용 책자로 만들어서 새벽에 전두환사
령관에게 올렸다.

전두환은 정승화계엄사령관에게 이 자료를 가지고 가서 결재를 맡
고 27일 오전에 계엄공고 5호를 통해서 발표했다. 이 공고는 서울에는
합동수사본부를 두고 지방의 계엄사무소에는 합동수사단을 두도록 했다.

합동수사단장은 그 지역의 보안부대장이 자동적으로 취임하게 되었
다. 대령인 보안부대장이 그 지방의 검사장까지 지휘하에 놓게 되었다.

이날부터 전국이 전대미문의 권력을 가진 합수본부 치하에 들어간
셈이었다. 정승화총장은 자신의 결심으로 탄생한 합동수사본부가 결국
은 자신을 무력화시키는 괴물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그날 밤에는 인
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선 합수본부가 총장 직속으로 되어 있어 헌병감이나 군검찰을 이
용하여 이 괴물을 견제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예컨대 치안처장은 육군헌병감이 맡게 되었는데 헌병이 합동수사본
부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버렸으므로 실질적인 견제수단이 약화되었다.

12·12사건 때 정승화 총장 연행에 동원되었던 합수본부측 요원 중
에는 헌병감의 두 직속부하가 포함되어 있었다.

정총장이 합수본부를 견제하려면 정보부를 통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포고령 5호가 발표되자마자 보안사 최예섭기획처장이 정보부감독관으로
부임하여 사실상 이 기구를 접수해 버렸다.

며칠 뒤에 이희성육군참모차장이 정보부장서리로 임명되었으나 그
는 보안사의 개입을 차단하지 못했다.

보안사에서 정보부에 보존되어 있던 정보자료들을 가져가고 정보부
간부들을 연행하여 조사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10·26사건은 내란사태
도 아니고 시위사태도 아니었다.

군대가 진압작전에 동원되는 계엄이었다면 실권은 실병부대장을 지
휘하는 계엄사령관에게 있었을 것이다. 10·26사건은 본질적으로 살인
사건이었다. 계엄업무의 핵심도 모두 이 수사와 관련이 있었다. 자연
히 실권은 수사권을 쥔 전두환의 합수본부로 쏠리게 되어 있었다.

더구나 그 합수본부장이 계엄사령관을 구속수사 대상자로 보고 있
는 상황이었다. 전두환사령관이 막강한 합수본부 설치 기안을 명령한
것은 아직도 김재규가 체포되기 전이었다.

전두환은 정부기관에서는 가장 먼저인 초저녁에 벌써 대통령이 시
해되어 병원에 안치되어 있다는 정보를 확인한 사람이었다.

전장군은 혼미한 상황에서 정확한 정보수집을 통해서 신속한 판단
을 내리고 주인을 잃은 권력을 낚아챌수 있는 고삐를 바로 잡아버린 것이
었다. 그는 권력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이였다.

27일 오전 8시30분 전두환합수본부장은 윤일균정보부해외담당차장,
전재덕국내담당차장, 오탁근검찰총장, 손달용치안본부장을 보안사 2층사령
관 접견실로 불렀다.

이들은 입구에서 삼엄한 몸수색을 당했다. 상석에 앉은 전두환은
입을 열었다.

"대통령 각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범인은 중앙정보붑니다.".

전장군은 박준광소령을 통해서 각 기관의 업무지침을 일방적으로 통
보했다. 특히 중앙정보부는 '앞으로 일체의 예산을 집행해서는 안된다.

다만 합수본부의 허가를 받으면 집행할 수 있다'고 못을 박았다.

전본부장은 또 "앞으로 모든 정보 보고는 오후 5시, 오전 8시에 합
수부에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정보부는 전재덕차장이 당분간 장악하라"고 지시했다가 선임자가
해외담당차장임을 알고는 수정했다.

박준광소령(현재 성남에서 변호사)은 전장군이 과거의 실력자들을
앞에 두고 좌중을 제압하면서 상황을 간단하게 장악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이 갑자기 커보이는 것이었다.
( 계속 )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