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대학교가 오는 10일 개교 1백주년을 맞는다. 1897년 미국 선교사와 평양 주민들이 힘을 모아 평양의 보통강변에 숭실학당을 세운 지 꼭 1백년이 되는 것이다. 일제하에서 많은 민족 지도자를 배출했고 우리나라 종교계의 거목들을 길러낸 숭실대의 역사와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알아보기 위해 배명철 사회부차장이 어윤배 숭실대 총장을만났다.

--교내 곳곳에 1백주년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등 학교 전
체가 큰행사를 앞두고 설레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1백주년이
라 하면 1897년에 대학이 설립되었다는 말인데, 당시 어떻게 해서 평
양에 대학이 설립될 수 있었습니까.

"1891년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 배위량(윌리엄 베어드·1862∼
1931)이 포교활동을 위해 우리나라에 왔습니다.전국을 다니며 선교하
다가 1897년 평양 신양리 보통강변에서 숭실학당을 세우게 됐습니
다. 당시는 국운이 쇠잔한 암흑기였는데 신학문을 가르쳐 국민을 계
몽하고 또 기독교를 전파하는데는 학교가 제일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
다. 천문, 지리, 동-식물학, 음악 등을 꾸준히 가르쳐오다 1906년에
대학부가 생겨났습니다."

--당시 대학부는 어떻게 운영되었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대학부에
다녔습니까.

"평양에 대학을 세운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평양 주민들이 1주일
만에 당시 돈 6천원을 모아 기탁했습니다. 이 돈으로 스팀 난방과 기
숙사,체육관,수세식 화장실 등 최신 시설을 지었습니다. 전국 각지에
서 찾아온 학생들은 상인의 자제와 농부의 아들 등 다양했습니다.".

--미국 선교사가 숭실학당을 세울때 기독교 선교가 큰 목적중의 하
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숭실의 건학 이념은 무엇이었습니까.

"3가지의 이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진리와 봉사라는 기독교 정
신에 입각,민족의 지도자가 될 젊은이를 키우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
교활동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이 잘 안모였는데 장학
금을 주고 공부를 시키며 선교하니 반응이 좋았다고 합니다. 마지막
은 미래의 한국 교단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숭실대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다 폐교되는등 민족정신을
고취하는데도 앞장섰다고 들었습니다. 일제하에 숭실이 배출한 민족
지도자들은 어떤 분이 있습니까.

"숭실은 신사참배 거부 뿐 아니라 을사조약 반대운동, 105인 사건,
조선국민회사건, 3·1운동, 광주학생운동 등을 통해 일관된 민족운동
을 전개했습니다. 차이석, 손정도, 김창준, 박희도, 조만식, 배민수
선생등 독립운동의 주역들이 모두 숭실 출신입니다.근대사에 오래 영
향을 미친 민족지도자는 다른 어느 학교보다 많이 배출했다고 자부합
니다.한경직, 박형룡, 강신명 등은 그속에서 성장해 우리나라 종교계
의 거목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정신이 숭실대의 학풍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
각됩니다.

"세계 사회에서 추앙받는 지도자는 우리나라에선 한경직 목사님이
유일하다고 봅니다. 우리 학교를 나온 한 목사님은 종교계의 노벨상
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받았습니다. 국내 장로회는 물론이고 미국에
서 가장 영향력이 큰 LA영락교회 당회장 등도 숭실 출신입니다. 교회
에 모이면 사람을 만나 집회하고 소신을 펼 기회가 많이 생깁니다.게
다가 역사적으로 서북지방 사람이 차별을 많이 당해왔는데 남녀 평등
의 기독교 정신이 움트기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이제는 지난 역사의 자부심을 바탕으로 숭실의 미래를 다져나가는
노력이 중요할텐데요, 총장님이 생각하시는 숭실의 미래는 어떤 것입
니까.

"현재 숭실대는 7개 단과대에 5개 학부, 19개 학과를 갖추고 있습
니다. 얼어붙은 강물 밑으로 물이 흐르는 것처럼 숭실의 이념과 전통
은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숭실이 지난 역사에서 개화와 근대
화에 영향을 미친것처럼 앞으로 정보화와 중소기업, 사회봉사 세가지
부문을 집중 육성해 국제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대학으로 발전할 것입
니다.".

--그러고 보니 총장님의 약력을 보니까 숭실대 중소기업대학원 초대
원장을 맡으신 걸로 되어 있습니다. 숭실대가 중소기업 부문에 특별히
중점을 두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민주주의의 뿌리는 자유기업제도이고 그 핵심이 중소기업입니
다. 사회복지와 행정을 공부하다 보니 복지정책의 테두리에서 사회보
장-고용창출 측면의 중소기업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25년
간 중소기업의 역할과 이념에 대해 연구, 교육하고 있습니다. 1983년
에 숭실에 세계최초로 중소기업대학원을 세웠지요. 우리 교수들은 동
구와 동남아에 파견돼 중소기업 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 지원과 함께 숭실의 3대 목표점중의 하나로 말씀하신
정보화 분야는 어떤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까.

"1970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자계산학과를 설치했고 현재 9개국,
23개 대학에서 우리 학생들이 교환수업을 받습니다. 총장실규모를 줄
인 대신 멀티미디어 회의실을 만들었어요. 지난해 설립한 정보과학대
학은 세계 10위권으로 성장, 우리나라 정보산업의 미래를 책임질것입
니다. 교육부와 언론기관 등의 평가에서도 정보화-세계화 부문은 늘
상위권에 들어갑니다.".

--개인적인 질문을 몇가지 하겠습니다. 73년에 숭실대 사회복지학
과 교수로 임용돼 교무처장, 부총장 등을 역임하셨는데요. 교수로서
행정보직을 많이 맡게된 별다른 경위가 있습니까.

"그때는 교수가 70∼80명밖에 안돼 통역이나 박물관 안내도 제가
했지요. 종합개발연구원장, 인문대학장, 사회대학장, 교무처장, 부총
장, 총장 직무대행 등 웬만한 보직은 거의 다 했습니다. 그렇다고 연
구와 후학 양성에 소홀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현재 총장을 하면
서 박사과정 학생들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 보직을 거치면서 숭
실대 발전방향의 가닥을 잡았다는 점에서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습
니다.".

--서울대 법대를 나오셨는데 숭실대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는 무엇
입니까.

"1973년 이한빈 박사가 총장으로 올 때 같이 왔습니다. 이 박사가
같이 일해보자고 권유했는데 기독교 대학에서 봉사한다는 소명의식에
따랐어요. 별다른 간섭 없이 자유롭게 세계 무대를 누비면서 연구에
정진할 수 있어 매우 편안했습니다.".

--71년부터 새문안교회 장로를 맡고 계시더군요. 지금도 교회일에
열심이십니까.

"6·25때 부산으로 피난가서 교인이 됐어요. 이한빈 박사도 그때
만났습니다. 64년 미국에서 장로가 됐고 지금도 새문안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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