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자 없이 잘 살아
그러니 자신이 없으면 내 곁에 오지를 마
나는 함부로 날 안 팔아
왜냐면 난
I don’t need a man I don’t need a man (What?)
I don’t need a man I don’t need a man (진짜)
I don’t need a man I don’t need a man (정말)
지금부터 꼭 10년전인 2012년 당대를 호령하던 걸그룹 미쓰에이가 발표했던 노래 ‘남자 없이 잘 살아’의 도입부 노랫말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멋지게 살겠다는 여성들의 주체적인 다짐을 발랄하고 경쾌한 비트에 담아서 만들었어요. 오늘 소개해드릴 주인공은 이 노래와 딱 어울립니다. 수컷의 씨를 받지 않아도 대대손손 번성하고 있다고 씩씩하게 포효하는 이들, 바로 호주의 여초(女超) 방아깨비들입니다.
이제 우리나라 잔디밭에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여름의 전령 방아깨비와 꼭 닮은 이 녀석의 학명은 ‘Warramaba vigro’랍니다. 최근 이 방아깨비의 생태를 관찰해오던 멜버른 대학 연구진이 믿기 힘든 놀라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 방아깨비들이 수컷은 단 한마리도 없는 전원 암컷들로 구성돼있고, 짝짓기 없이 자기복제만으로 번식을 해왔다는 것이죠. 연구진은 이 방아깨비를 “성행위를 하지 않고 번식이 가능한, 모두가 암컷인 아주 독특한 종”이라고 소개하고, “진화에 대한 매력적인 통찰력을 준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자기복제과정은 암수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번식 과정과 하등 다를바가 없었다는 것이죠.
연구를 이끈 멜버른대의 마이클 커니 교수는 “이번 발견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성생위를 통한 번식이 종의 번성에 이롭다는 통상의 진화 이론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통상의 이론이란 이렇습니다. 일부 원시적인 생명체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동물은 암컷과 수컷으로 구분돼있습니다. 이들이 신체를 맞대고 교접하면서 각자 가지고 있던 유전자가 뒤섞입니다. 그 교접방법은 종마다 제각각이죠. 다만 이 과정을 통해 다양한 유전자가 만나고 버무려지면서 유전적 다양성을 갖추게 됩니다. 이에 비해 자기를 복제하는 단성생식(또는 무성생식)을 할 경우 각종 기생충과 나쁜 유전적 변이 등의 부작용에 더 취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통념을 깨뜨린 것이 바로 호주의 ‘여초 방아깨비’입니다.
연구진은 이 종을 18년동안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복제방식으로 대를 잇는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또 암컷과 수컷이 만나서 정상적으로 2세를 번식하는 다른 방아깨비·메뚜기종과 비교했을 때 유전적인 열성요인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죠. 연구진은 이 방아깨비가 25만년전에 친척뻘이면서 별개의 종인 ‘Warramaba whitei’와 ‘Warramaba flavolineata’ 사이의 교잡을 통해 탄생해서 지금까지 번성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 과학대중매체는 연구 결과를 소개하면서 “이 호주 방아깨비들은 25만년전에 XX를 포기했지만 잘만 살고 있더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도 뽑았습니다.
함께 연구에 참여한 멜버른대의 애리 호프먼 교수는 ‘성행위 고비용론’까지 주창합니다. 이성 파트너를 찾는데 시간과 정력을 들이면서 오히려 포식자에게 잡아먹힐 수 있는 위험요소는 커진다는 것이죠. 호프먼 교수의 일갈이 인상적입니다. “우리가 남자(수컷) 없이도 여전히 독자생존 가능한 후손들을 번성시킬 수 있다면, 굳이 왜 XX에 휘둘릴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가 사람이기에 이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뿐, 방아깨비들은 이렇게 포요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수컷따윈 없어도 잘 만 산다고!”
이번 연구 결과가 발표된 시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공교롭게도 최근 개봉되자마자 박스오피스 정상으로 뛰어오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쥬라기월드 도미니언’에서도 이성과의 접촉 없는 자기복제 가능성을 매우 진지하게 다루고 있거든요. (약간의 스포있음) 영화에는 남성 파트너없이 혼자서 뱃속에 아이를 품어 내보낸 천재 여성과학자, 그리고 역시 수컷 없이 자기복제식으로 새끼를 낳은 뒤 정성껏 돌보는 공룡 밸로시랩터 암컷이 등장합니다. 이 둘은 인간과 공룡이라는 신체적 차이를 극복하고, 홀로 2세를 생산해내면서 부성이 제거된 모성이 성공적으로 발현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영화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같지만, 암컷이 단성번식은 비교적 고등한 동물에게도 일어나는 사례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지상 최대의 파충류인 코모도왕도마뱀입니다. 일부 암컷은 수컷과 짝을 짓기 힘든 극단적인 환경이 되면, 자기복제하는 식으로 2세를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물원에서 사육하는 일부 동물들도 드물게 수컷의 ‘개입’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단성 번식 사례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록된 사례들은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대를 이으려는 과정에서 벌어진 비정상적 상황으로 보입니다. 기적과 같이 자기복제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암수의 결합을 통해 만들어진 동종 개체보다 생존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거든요.
‘여초 방아깨비’는 그런 일반적인 관측에 도발적 질문을 던집니다. 수컷이 제거된 상황에서 홀로 증식하는 방법이 불가피한 상황에서의 임기응변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진화로 볼 수는 없는가? 만일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서로 다른 이성이 만나서 정신·육체적으로 가까워지고 이 과정을 통해서 유전적 다양성을 물려받은 후대 세대가 생산되는 매커니즘 자체가 통째로 흔들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신화의 일부분으로 남겨져있는 아마조네스의 전설은, 인류가 앞으로 당도하게 될 오래된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언뜻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