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시네마 클래식’은 영화와 음악계의 이모저모를 들려드리는 ‘이야기 사랑방’입니다. 전·현직 담당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취재 뒷이야기와 걸작 리스트 등을 전해드립니다. 오늘은 황지윤 국제부 기자가 이달 초 개봉한 영화 ‘쁘띠 마망’을 소개해드립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으로 한국에서도 마니아층이 두터운 셀린 시아마 감독의 신작입니다. 황 기자는 2019년 문화부에서 1년간 영화를 담당하며 ‘혼자 보긴 아까워’ 코너를 연재했습니다. 혼자만 간직하기에는 어쩐지 아쉬운 영화들을 틈날 때마다 소개해드릴 예정입니다.

/찬란

지금 극장가에 걸려 있는 영화 중 꼭 봐야할 영화를 골라야 한다면 단연 ‘쁘띠 마망’입니다. 1시간 12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마법과도 같은 경험을 선사하는 영화입니다.

엄마를 둔 딸이라면 한 번쯤 해본 상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의 엄마와 만난다면 어떨까?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다소 드라이한 성격인 저는 ‘굳이?’라고 되묻고 상상을 매듭지었지만, 영화 속 넬리와 마리옹은 좀 더 다정한 전개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넬리는 어린 시절의 엄마 마리옹과 눈을 마주치는 그 순간 친구가 됩니다. 이들이 주고받는 시선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애틋함이 있습니다.

영화는 요양원에서 외할머니의 죽음을 마주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넬리와 엄마 마리옹(그리고 아빠)은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시골집으로 향합니다. 마리옹의 유년시절이 듬뿍 묻어나는 곳에서, 모녀는 마리옹이 어린 시절 그리고 쓴 그림과 글을 함께 넘겨봅니다. “철자는 별로인데 그림은 잘 그렸네” 넬리가 웃으며 말합니다.

마리옹은 엄마를 잃은 상실감에 더해 물밀듯 밀려오는 유년의 기억 때문인지 심경이 복잡해 보입니다. 혹은 평소 우울한 기질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딘가 위태로워 보일 정도입니다. 마리옹은 딸에게 ‘침대 끝에 어른거리던 흑표범(그림자)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밤을 무서워했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다음날 아침 아빠는 태연한 척 “엄마는 먼저 갔다”고 말하지만, 딸은 엄마의 갑작스런 부재에 어딘가 심상치 않은 데가 있음을 직감합니다.

떠나기 전날 밤, 엄마 마리옹(왼쪽)은 딸 넬리에게 침대 가장자리에서 마주치곤 했던 흑표범을 두려워했다는 일화를 들려준다. /찬란

마리옹이 떠난 날, 넬리는 숲 속에서 제 나이 또래인 한 소녀를 만납니다. 이름은 ‘마리옹’. 소녀의 집에 놀러 가서야 알게 됩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마리옹은 어린 시절의 엄마라는 사실. 지금 앉아있는 부엌 식탁이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자신이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먹은 바로 그 식탁이라는 것을요.

“비밀이 있어. 이건 내 비밀이면서 네 비밀이기도 해. 난 너의 아이야.” 넬리의 충격 고백에 마리옹은 생각보다 크게 동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내 마음속엔 네가 있거든.” 어린 마리옹은 넬리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영화 ‘쁘띠 마망’을 한눈에 조망하는 대사라고 봅니다. 과거-현재-미래를 초월하는 마법 같은 말이기도 하고요. 모녀지간인 것을 알게 된 이후 이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깊은 곳의 원초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감동이 있습니다.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는 어린 마리옹(왼쪽)과 넬리. /찬란
마리옹(왼쪽)의 생일을 맞아 함께 크레페를 만드는 모습. /찬란

넬리와 마리옹. 둘 사이에는 시간을 넘어 ‘이어져 있다는 감각’이 존재합니다. 사랑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사랑과 무관하지 않은 그 어떤 1차원적인 감각. 이 묘한 애틋함이 둘 사이에, 그리고 영화 전반에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는 걸 이때쯤부터 느꼈던 것 같습니다.

엄마를 둔 딸, 딸을 둔 엄마라면 설명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아는 ‘그 감각’을 시아마 감독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또 담대하게 담아냈습니다. 힐링 영화는 아니지만 치유 받는 느낌이 드는 건 이 때문일까요. 휙 하니 사라졌던 엄마 마리옹이 다시 넬리를 마주하고 서로 이름을 부르는 마지막 장면이 주는 울림도 큽니다. 물론 과잉으로 흐르지 않는 간결한 연출 덕에 신파를 마주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전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마찬가지로 시아마 감독은 음악 또한 극도로 절제합니다. ‘쁘띠 마망’에는 중후반부에 한 번,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한 번. 이렇게 총 두 번 외에는 배경음악이 깔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마지막 씬을 장식한 비발디의 사계 ‘여름 3악장’처럼,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로 적시 적소에 음악이 들어갔다고 느낍니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Des voix d’enfants, chanteront de nouveaux rêves(아이들의 목소리가 새로운 꿈을 노래하리라)” 합창이 울려 퍼질 땐, 몽글몽글하게 격해진 감정을 잠재우느라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다 일어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