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백련암 문 앞에 선 성철 스님. /백련불교문화재단

“책 읽지 말라!”

‘성철(性徹·1912~1993) 스님’을 떠올리면 저절로 연상되는 대표적 ‘한마디’ 중 하나입니다. 성철 스님은 이 한 마디 때문에 ‘책 안 읽은 스님’, 혹은 성철 스님에 대해 좀 아는 분들에겐 ‘자신은 동서고금의 책을 읽으면서 제자들에겐 책 못 읽게 한 스님’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랬던 성철 스님이 평생 아껴 읽은 책들이 인터넷에 공개됐습니다.

동국대 불교학술원은 지난달 ‘성철 스님의 책’이란 도록을 펴냈습니다. 그뿐 아니라 동국대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홈페이지(http://kabc.dongguk.edu)에 이 도록에 실린 서지사항과 이미지 자료를 올렸습니다. 백련암에 소장된 성철 스님의 책 중 2231권을 조사해 주요문헌 120종에 대해 이미지와 해제를 수록했습니다.

장서를 소장한 해인사 백련암 장경각 앞에 선 성철 스님. 성철 스님은 생전에 장경각 열쇠를 제자들에게도 맡기지 않을 정도로 책을 아꼈다. 장경각 문이 열린 상태로 촬영된 사진도 드물다고 한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사실 성철 스님은 책을 무척 아꼈으면서 제자들에겐 ‘책 읽지 말라’고 했던 분입니다. 상호 모순적으로 보이지요? 그렇지만 두 면모를 합쳐 놓은 것이 성철 스님입니다. 성철 스님은 ‘수좌오계’라 하여 참선수행하는 스님들이 명심해야 할 금기 다섯가지로 ‘잠 많이 자지 말라’ ‘말하지 말라’ ‘과식하지 말라’ ‘문자 보지 말라’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희귀도서를 포함한 1만권에 이르는 장서를 소장했던 장서가이기도 했지요. 그는 저 유명한 ‘백일법문’이나 명저(名著) ‘선문정로’ 등을 준비할 때 이 장서들을 철저히 참고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철 스님의 ‘책 읽지 말라’는 말씀은 문자나 언설의 틀에 빠지지 말라는 뜻으로 새겨야 할 듯합니다. 다만 초기엔 맏상좌인 천제 스님에겐 산스크리트어와 영어 공부까지 열심히 하라고 독려했던 성철 스님이 왜 나중엔 ‘책 읽지 말라’고 강조하셨는지는 궁금하네요.

백련암을 찾은 비구니 스님들과 장경각 앞에서 기념촬영한 성철 스님. 왼쪽부터 인홍 묘엄 불필 스님. /백련불교문화재단

성철 스님 생전에 20년간 바로 곁에서 시봉했던 원택 스님은 “큰스님의 책 사랑은 지극했다”고 합니다. 성철 스님 장서의 토대는 1947년 김병용 거사로부터 희귀 경전 등 1700책을 기증받은 것이 시작입니다. 이후 성철 스님은 거처를 옮길 때마다 ‘책 이사’가 최우선 순위였답니다. 모든 것이 편리해진 요즘에도 보통 사람들이 이사할 때 가장 골치를 앓는 것이 종이책입니다. 그런데 70년 전, 그것도 전쟁 피란 와중에 사람도 피란가기 힘든데 책부터 옮기려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성철 스님은 항상 거처를 옮기기 전에 그 사찰(암자)에 책을 소장할 만한 공간이 있는지부터 챙기셨답니다. 그 결과 성철 스님의 책은 봉암사, 통영 천제굴, 파계사 성전암, 김용사를 거쳐 지금 해인사 백련암에 온전히 남아있게 된 것이지요.

현재 백련암 서고.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팀이 자료 조사를 마친 후의 모습이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성철 스님은 장서를 모아 놓은 장서각 열쇠는 항상 남에게 맡기시는 법이 없이, 참고할 책(경전)이 있으면 직접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 찾아 읽으셨다고 합니다. 당시 장서각은 궤짝 같은 장에 경전을 넣어두었는데, 책의 배치나 위치도 당연히 성철 스님 밖에 모르셨겠지요. 다만 1년에 한 번, 제자들도 장서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답니다. 장마철이 지난 후 습기를 머금은 책들을 널어말리는 거풍(擧風) 때였다고 합니다. 그 외에는 책은 장서각 안에 꽁꽁 숨어있다고 합니다. 성철 스님은 책을 빌려주는 것도 질색했답니다. 애서가들의 공통점이지만, 빌려가서 제대로 돌아오는 경우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경전 등 고서 뿐 아니라 ‘타임’ ‘라이프’ 등 잡지도 즐겨 읽으셨다고 합니다. 특히 ‘라이프’지에 실린 생명과학 등 과학기사를 좋아하셨답니다.

성철 스님도 연세가 드시면서는 제자들에게 열쇠를 주며 ‘장서각 어디어디에서 어떤 책을 찾아 오너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열반 얼마 전에는 괘짝식으로 쌓아놓은 책을 일반 도서관 서가(書架)처럼 쉽게 찾고 꺼내볼 수 있도록 새 집을 짓자고 하셨습니다. 새 건물 이름을 ‘고심원(古心院)’이라고 붙여 주셨는데 입적하시는 바람에 새 도서관은 이용하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주인’이자 유일한 ‘이용자’를 잃은 건물은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장서는 임시서고로 옮겨졌습니다.

1993년 성철 스님 열반 후 장서각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습니다. 그러다가 16년이 지난 2009년 ‘장서각 발(發)’ 뉴스가 나왔습니다. 16세기에 목판 인쇄한 ‘십현담요해언해’라는 희귀도서가 장서각에서 ‘발견’된 것이지요. 제자 원택 스님이 장서를 정리하던 중 발견했습니다. 아마 성철 스님은 하늘에서 그 뉴스를 들으며 웃으셨을 것 같습니다. “내가 항상 들춰보던 책을 ‘발견’했다고?”라면서 말입니다. 그만큼 성철 스님의 장서는 ‘비장(祕藏)’돼 있었습니다.

다시 장서가 빛을 보게 된 것은 2017년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팀이 성철 스님의 소장도서를 조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3년에 걸쳐 정기적으로 장서각을 찾아 자료를 분류하고 한 장 한 장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그 결과 도록과 인터넷 서비스가 가능해졌지요.

도록을 넘기다보면 흥미로운 장면을 여럿 발견하게 됩니다. 대개 애서가들 가운데에는 ‘모으기’에만 열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장도서는 엄청나게 많은데 막상 책장을 넘겨보면 읽은 흔적이 없는 책이 많은 경우이지요. 그러나 동국대 조사팀이 조사한 결과, 성철 스님은 거의 모든 소장 도서를 다 읽은 것으로 파악됐다고 합니다. 책장 사이사이에 스님이 읽으며 핵심 내용을 적어놓은 메모지가 끼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조사 결과, 성철 스님의 유명한 ‘백일법문’엔 경전 80종, 저서 ‘선문정로’엔 88종이 인용된 것을 확인했답니다.

성철 스님이 만 20세 때인 1932년까지 모은 책을 기록한 '이영주 서적기'. 세계문학명구선집, 에스페란토 독습법등 65종의 책 이름을 적은 이 기록은 성철 스님이 소장한 책의 갈피에 끼워져 있었다. 장서목록 제일 왼쪽엔 '신구약성서'도 보인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성철 스님이 만20세 때인 1932년 12월에 자필로 적은 ‘이영주 서적기’도 흥미롭습니다. 이 글은 ‘간례휘찬’ 책 갈피에 끼워져 있었는데요, 스무살 때까지 성철 스님이 모은 장서 목록입니다. 철학개론, 논리학통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등 철학서와 남화경·근사록·소학·대학·중용·채근담·주자가례 등의 동양사상을 다룬 책과 함께 에스페란토 독습서와 세계 문학 명구 선집이 적혀 있고 맨마지막엔 ‘신구약성서’가 올라있습니다. 출가 전 청년 이영주의 관심과 독서의 폭을 이해할 수 있는 목록입니다.

1947년 봉암사 결사 중 김병룡 거사에서 책을 기증받은 후 스님은 ‘수다라총목록’이란 목록을 직접 작성했습니다. ‘수다라(修多羅)’란 산스크리트어 ‘수트라’를 한자로 바꾼 단어로 ‘경전’이란 뜻입니다. 이 목록을 작성하면서 성철 스님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책은 호은(湖隱) 김병룡 거사가 기증한 수다라목록이다.(중략) 널리 법해(法海)의 나루를 건너는 뗏목과 오래도록 인천(人天)의 안목이 되길 지극히 기원하고 또 기원한다. 운수걸납(雲水乞納) 성철 쓰다.” ‘운수걸납’이란 수행승이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겸손한 표현이지요.

성철 스님이 친필로 쓴 '결정서'. 자신의 사후에도 소장도서는 백련암에 보관한다는 내용이다. 1960년대 후반 성철 스님이 해인사 백련암에 거처를 정한 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백련불교문화재단

‘결정서’란 문서도 있습니다. ‘퇴옹성철의 소장서적은 퇴옹 원적(圓寂·열반) 후 퇴옹 문도들이 공동으로 관리하고 보호하여 개인의 관여를 불허하며 지금과 같이 계속하여 백련암에 보관한다’고 직접 썼지요. 아마도 성철 스님이 해인사 백련암으로 거처를 옮긴 후인 1960년대 후반에 만든 문서인 듯 합니다. 연월일(年月日)과 입증인·문도대표 란이 비어있는 것으로 보아 ‘미완’인 상태로 보입니다만 성철 스님이 책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증거이지요.

'성철 스님의 책' 도록.

원택 스님은 “제자인 저희들이 큰스님 소장도서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덕분에 온전히 보전됐다”며 웃었습니다. 목록을 알고 가치를 알게 되면 자랑하게 되고, 자랑하게 되면 ‘손 타는 일’이 벌어졌을 것이란 말씀이지요.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의 책’ 도록 ‘감사의 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큰스님은 일찍이 아셨을 것입니다. 백련암 동구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누구에게도 쉽게 허락되지 않았던 장경각의 책들이 인터넷으로 세상에 공개되는 시점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