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매달 내는 건강보험료를 관리하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사장 강도태)에서 직원이 약 46억원을 횡령하고 해외로 도피한 사건이 발생했다. 공공기관 직원의 도덕적 해이와 함께 윤석열 정부 출범 후 보건복지부 수장이 4개월째 공석(空席)인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가 나온다.

서울 마포구 염리동 국민건강보험공단 전경./뉴스1

건보공단은 23일 오후 보도 참고자료를 내고 “전날 오전 업무 점검 과정에서 21일 진료비 지급보류액이 무단 입금된 사실을 인지했다”며 “즉시 해당 직원을 경찰에 형사 고발하고 계좌를 동결 조치했다”고 밝혔다. 공단은 “피의자의 업무 담당 기간(2021년 1월~2022년 9월)을 전수조사한 결과 6개월간 46억원을 횡령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공단 관계자는 “피해 최소화를 위해 경찰과 긴밀히 협조하고 있다”고 했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문제가 된 직원은 본부 채권관리실에서 근무 중인 40대 팀장(3급 상당) 최모 씨다. 2004년 입사해 근속 기간이 20년 가까이 된 중간 관리자급이다. 올해 4~7월과 9월 16일, 9월 21일 등 세 차례에 걸쳐 요양기관이 공단에 청구한 의료보험비 중 지급보류된 돈을 ‘셀프 결재’를 통해 빼돌린 것으로 나타났다. 거짓 청구가 의심돼 일단 지급이 보류된 돈들이 관리가 잘 안 된다는 점을 악용해 윗선 결재를 생략하고 개인 계좌로 송금한 것이다. 이번 횡령 규모인 46억원은 공단 내부에서 발생한 범죄 중 가장 큰 규모 액수다. 액수는 수사 결과에 따라 더 늘어날 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단은 감사실이 횡령 사실을 인지한 직후인 22일부터 23일 새벽까지 밤샘 회의를 했고, 이날 오후 공개를 결정했다. 최씨는 지난주 “가족들과 독일로 여행을 간다”며 휴가를 냈는데, 문제가 터지자 공단 측과의 통화에서 “죄송하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최씨는 현재 유럽으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공단 관계자들이 그의 귀국을 설득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대규모 횡령 사건은 최근 민관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 올해만 해도 오스템임플란트(2215억원), 우리은행(614억원), 계양전기(245억원), 서울 강동구청(115억원) 등 내부 직원이 횡령 혐의로 검거된 사례가 잇따랐다. 주요 원인으로는 직원의 개인적 일탈, 감사 시스템의 부재, 부동산이나 코인 등 투자 열풍 등에 편승한 한탕주의 등이 꼽힌다.

하지만 건보공단 같은 준정부기관에서, 그것도 자금 이체를 담당하는 직원이 수십억원을 횡령한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해당 직원이 해외에 체류 중인 것으로 파악돼 수사와 피해금 추징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건보료율이 올해 6.99%로 전년 대비 0.13%포인트 인상됐고, 내년도 요율도 0.1%포인트 인상을 결정한 와중에 벌어진 일이라 당국이 여론 악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이다. 10월 있을 보건복지부 국정감사에서도 이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공단은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했고, 이사장을 단장으로 하는 비상대책반을 구성해 현금 지급을 수행하는 전 부서를 특별점검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횡령 범죄가 발생한 직원 수 1만5000여 명의 건보공단의 근무 기강과 도덕적 해이도 심각 수준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단에서는 지난해부터 올해 7월까지 언어 희롱·부적절한 신체 접촉 등 총 5건의 성범죄가 발생했는데, 복지부 산하 공공기관 가운데 가장 많은 징계 건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3급 이상 고위 직원들이 금품과 향응 수수로 정직·파면·해임 처분을 받고, 일부 직원이 대부업자에게 개인정보를 유출해 파면당하는 일도 있었다. 또 지난해에는 공단 직원이 2017~2018년 공단이 발주한 사업 입찰 관련 총 1900만원의 뇌물을 받아 재판에서 10년 중형을 선고받았다.

최씨의 횡령은 현재까지 올해 4~7월과 9월 등 세 차례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확인됐다. 이 때문에 지난 5월 25일 권덕철 전 장관이 물러난 이후 4달 가까이 복지부 수장 자리가 비어있는 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정호영 경북대 의대 교수, 김승희 전 국회의원을 차례로 장관 후보에 지명했지만 모두 자진 사퇴로 끝맺었다. 정 전 후보자는 이른바 ‘아빠 찬스’ 논란이 일었고, 김 전 후보자의 경우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면서 물러나야 했다. 결국 이달 초 기획재정부 출신인 조규홍 1차관을 4개월 만에 승진시키기로 결정, 27일 국회 인사 청문회가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