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선서하는 尹대통령 -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앞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헌법 제69조에 따라 선서를 하고 있다. 이날 0시 임기를 시작한 윤 대통령은 2027년 5월 9일 자정까지 5년간 대통령 직무를 수행한다. /이덕훈 기자

10일 취임한 윤석열 대통령은 10여 분에 걸쳐 발표한 취임사에서 ‘자유’를 35차례 언급했다. 정치권에선 이날 취임사를 두고 국정 전반에서 자유의 가치를 바탕에 두겠다는 “윤석열식 자유선언문”이란 평이 나왔다. 윤 대통령 측근은 “한국 민주주의가 다수의 힘으로 자유를 억누르는 위기 상황이라 보고, 국정 운영의 방향을 자유 가치를 복원하는 데 맞추겠다는 뜻”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으로 ‘반(反)지성주의’를 지목하고 갈등 해결을 위해 “과학과 진실이 전제돼야 한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은 10일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유·인권·공정·연대의 가치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다하고 존경받는 나라를 위대한 국민 여러분과 함께 반드시 만들어 나가겠다”고 했다. /KOCIS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하고, 국제사회에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갖고 이 자리에 섰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한국은 물론 세계가 ‘복합 위기’에 놓여 있는데 이를 극복해야 할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진단했다. 그는 특히 “위기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게 바로 반지성주의”라고 했다. 그는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국회사진기자단

윤 대통령의 이런 언급을 두고 문재인 정권의 행태를 반지성주의로 규정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발탁돼 검찰총장에 올랐지만 조국 전 법무장관 일가 수사를 지휘하다가 조 전 장관 지지자들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윤 대통령 측근은 “자유 가치의 핵심은 진실 존중”이라며 “실체적 진실 발견의 과정인 수사가 진영 논리로 공격받게 되면서 자유주의의 실종을 심각히 고민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국민의힘 한 의원은 “개인의 책임보다는 국가 책임을 강조하는 포퓰리즘 행태에 대한 경계의 뜻도 담긴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실무진이 작성했던 취임사 초고에는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관련 내용이 없었다고 한다. 한 관계자는 “취임식 일주일 전쯤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 대통령이 먼저 이 개념을 꺼냈다”고 했다. 그는 “윤 대통령은 좌우를 따지지 않고 증거를 무시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이들을 반지성주의자로 규정했다. 이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취임사 주요 발언

‘반지성주의’라는 단어는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미국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미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1916~1970)는 매카시즘 등을 탐구한 저작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반지성주의자는 자료나 증거보다 육감이나 감정을 기준으로 사안을 판단한다”고 했다. 반지성주의는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에서 재조명받으며 우파 성향 트럼프 지지자를 비판할 때 쓰였다. 그러나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포퓰리즘에 좌우가 따로 없듯 반지성주의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는 보편적 가치”라며 “자유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했다. 진영 논리로 대립과 갈등이 일상화한 한국 정치를 정상화하려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자유’ 가치 회복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한다”며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라고 했다. 소통이나 국민통합도 진영에 관계 없이 과학과 진실 같은 전제에 동의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이런 인식에는 일부 우파 진영 내 극단주의에 대한 경계도 담겼다는 해석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작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 당내 경쟁자들을 겨냥해 “국민이 당신들에게 실망했기 때문에 나를 불러낸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 박근혜 정권 때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을 수사하다가 정권과 불화를 빚고 좌천되기도 했다. 윤 대통령 측근은 “국정원 댓글 사건도 핵심은 선거법 위반이냐 아니냐는 사실과 법리의 문제였는데 권력은 이를 ‘우리 편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접근했던 것”이라고 했다. 이날 윤 대통령 취임사 전체 분량은 3303자로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사(8969자), 박근혜 전 대통령 취임사(5558자)보다 짧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대통령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