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대변인 토론배틀에 도전한 민계식 전 현대중공업 회장이 2021년 6월 25일 오후 서울 중구 조선일보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오종찬 기자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1호 공약으로 내건 ‘대변인 선발’ 토론 배틀이 79세 참가자로 인해 세간의 화제가 됐다. 36세 당대표가 몰고 온 세대교체 바람 속에 18세 고교생까지 참가한 대변인 오디션에 도전장을 낸 이 최고령 참가자는 현대중공업 회장을 지낸 민계식씨다. 그는 지난 24일 2차 압박면접에서 탈락했다. 25일 저녁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민씨는 백팩을 메고 나타났다. ‘6·25전쟁 71주년’ 기념 행진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는 민씨는 “도전이 싱겁게 끝나긴 했지만 담담하다”고 했다.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났지만 “청년·노인이 모두 도전할 수 있는 경쟁의 문이 열렸고, 내가 흥행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 것 같아 만족한다”고 했다. 그는 “나라를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일이라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며 “젊은이들이 일할 수 있도록 기성세대는 이들을 믿고 뒷받침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는 ‘태극기 집회’에 참석해온 이른바 ‘태극기파’다. 민씨는 “집회 참가자 대다수는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지만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끼리 모여 울분만 토로해서는 자기 위안밖에 안 되더라”며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79세 노장의 黨대변인 도전

―토론배틀 도전자 중 최연장자인데.

“프랑스의 2차 대전 영웅 몽클라르 중장은 6·25가 발발하자 스스로 계급을 네 단계 낮춰 중령으로 참전해 공을 세웠다. 나라를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토론배틀을 해보니 어땠나.

“좀 싱겁게 끝났다. 30대 젊은이와 한 조가 돼 압박면접을 받았다. 한명당 4분씩 할애되다 보니 말할 시간이 좀 부족했다.”

지난 24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열린 대변인 선발 토론 배틀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민계식씨. /이덕훈 기자

―면접에서 어떤 질문을 받았나.

“면접관들이 젊은 친구에게 먼저 ‘문재인 대통령이 앞에 앉아있으면 무슨 말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을 나한테 했으면 잘 대답했을 텐데. 나한테는 ‘국민의힘의 결정과 당신 의견이 다르면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물었다. ‘합리적인 토론을 거치되 결론이 도출되면 따라야 한다’고 답했다. 조직이 조직다우려면 그래야 한다.”

민씨는 “면접관들이 국민의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답했는데 그래서 떨어졌는지…”라며 웃었다.

―대변인 선발에 왜 지원했나.

“대통령 중심제는 결국 양당 정치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양당이 상대를 흠잡고 끌어내리는, 네거티브 정치다. 건전한 정책 대결을 해야 하는데 내가 대변인이 되면 토론에 나가 잘할 자신이 있었다.”

2차 면접 탈락...”싱겁게 끝났지만 담담”

―어떻게 나가게 됐나.

“지난 일요일(20일) 서울 강남역 근처를 지나는데 사람이 잔뜩 몰려 있어서 뭐 하는 건가 봤더니 이준석 대표가 시민과 토론회를 한다는 거다. 발언 신청을 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다 7번째로 발언했다. 젊은 세대에 빚을 잔뜩 떠넘기고 세대·계층·성별 갈등을 조장하는 문재인 정권에 대해 비판했다. 이 대표가 듣더니 토론배틀에 참가해보라고 하더라.”

―준비는 얼마나 했나.

“직접 자기소개서 쓰고 이틀 정도 생각을 정리했다. 평소 생각대로 말하면 되니 큰 준비는 하지 않았다.”

―기업 CEO 시절 입사 지원자들을 심사하는 입장이었는데 탈락한 기분이 어떤가.

“담담하다. 최선을 다했느냐가 중요하지 결과가 날 괴롭히진 않는다.”

민씨는 경기고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MIT 대학에서 해양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해서는 대우조선을 거쳐 현대중공업에서 22년간 일하며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랐다. ‘한국 조선업의 대부(代父)’로 불린다.

―젊은 사람들과 경쟁하는 게 자존심 상하지 않았나.

“나는 항상 스스로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유학 시절 ‘이런 머리로 박사 공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많았다. 하지만 사회는 다양한 사람이 섞여 있는 곳이다. 그걸 존중하면 자존심 고민은 사라진다.”

―기성세대가 당대표가 됐으면 오히려 경쟁 없이 영입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기성세대 당대표라면 대변인을 자기가 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모를 하니 내가 되든 안 되든 기회가 주어졌다.”

―보수층 일각에선 이 대표 정체성에 의구심을 제기하는데.

“내 주변에서도 이 대표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대표에게 큰 뜻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젊은 사람들을 믿고 맡기면 된다. 물론 사안을 여러 각도에서 보는 연륜은 부족할 수 있다. 그런 점이 있다면 나이 든 사람이 뒷받침해주면 된다.”

―이 대표에게 어떤 뜻이 있다고 보나.

“정권을 교체해야 나라를 바로 세우지 않겠나. 말로만 현 정권을 비난하면 뭐하나.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이 대표는 그런 힘을 키우겠다는 뜻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탈락 후 이 대표한테서 연락이 왔나.

“이 대표가 전화를 걸어왔는데 내가 받기 어려운 상황이라 다른 사람이 받았다. 미안하다고 했다고 한다. ‘대변인으로는 스펙이 너무 강하다’고 하더라. 대신 의견을 구할 일 있으면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기성세대, 유연하고 개방적으로 바뀌어야

민씨는 ‘나라지킴이고교연합’이란 보수 단체 대표를 맡고 있다. 주말마다 회원들과 함께 서울 도심에서 현 정권을 비판하는 1인 시위를 한다.

―태극기 집회에 참석해왔나.

“그렇다. 그런데 1년 정도 집회에 참석하면서 깨달았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울분을 토해봐야 자기 위안밖에 안 되더라. 태극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바라보는 젊은이들 시선도 좋지 않았다. 생각이 다른 사람, 특히 젊은이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섞여야 한다.”

민씨는 현대중공업에서 은퇴한 후 카이스트 대학원에서 ‘해상풍력에너지’라는 과목으로 강의했다. 당시 강의를 하다가 크게 화를 내고 강의실을 박차고 나간 일이 있다고 한다. ‘기업 CEO 일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해보라’고 했더니 ‘어떤 주식 종목에 투자하면 좋겠냐’는 질문만 잇따라 해 “질문 같은 질문 좀 하라”고 화를 냈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 ‘꼰대’인가.

“당시엔 젊은 세대를 잘 몰랐다. 그런데 2018년 국가기술유공자로 선정되고 전국의 과학고나 대학을 다니며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젊은이들 생각이 우리 세대와 많이 다르다는 걸 알았고 그들을 이해해야지 훈계만 하려 해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태극기 세력 일부에선 국민의힘을 비난하는데.

“태극기 집회에 나온 사람 대다수는 애국자다. 하지만 집회나 캠페인 방식을 바꿔야 한다. 현 정권을 원색적인 언사로 비난만 하면 젊은이들은 거부감을 갖는다. ‘청년 일자리 창출하라’ ‘국민을 보호하라’ 같이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구호로 정부를 비판해야 한다. 보수도 유연하고 개방적인 관점에서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한다.”

―토론배틀 참가에 주변 반응은 어땠나.

“한 지인은 ‘치욕적’이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더라. 비판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석 대표를 좀 지켜보자’고 했다. 그랬더니 ‘너무 비난해서 미안하다’고 한 사람도 있고 ‘트로이의 목마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더라.”

―만약 국민의힘 대변인에 선발됐으면 이준석 대표와 호흡을 맞출 수 있었을까.

“국가의 사명이 무엇인가. 국민을 보호하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헌법 가치 아래 경제 발전을 지속하고 사회 정의를 확립하는 것 아닌가. 그걸 이루겠다면 누구든 도울 것이다. 나이는 상관없다.”

민씨는 대학 1학년 때인 1961년 서울 마라톤대회에 출전해 2시간23분48초로 7위를 한 마라톤광이었다.

―요즘도 마라톤을 하나.

“생활이 너무 불규칙해서 못한다. 김일성 회고록 판매 규탄 기자회견, 탈북민 강제북송 규탄 기자회견 같은 행사가 잡히면 바로 뛰어나가야 한다.”

‘국민 보호' 하는 정권 들어서면 내 역할 끝

―이준석 대표는 공직 후보자 자격시험을 치겠다고 한다. 동의하나.

“공직자에겐 능력과 인품이 중요하다. 그런데 인품이 나쁜 능력자는 해롭다. 절충해야 한다. 시험을 보는 게 필요할진 모르겠는데 당에서 교육한다면 나는 흔쾌히 배울 것이다.”

―기업을 경영해본 입장에서 한국 정당의 문제는 뭔가.

“보스 공천이 문제다. 정치인들이 공천받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한다. 능력 있는 사람이 정당을 찾지 않는 것도 공천 문제 때문이다.”

―언제까지 정치 활동을 할 건가.

“내년 대선 때까지다. 올바른 정권이 들어서면 내 역할은 끝이다.”

―어떤 정권을 바라나.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 보호’에 있다. 희망을 잃은 젊은 세대를 보면 애처롭다. 우리나라는 기업들이 중요 산업에서 세계 1위를 달리는 놀랍고 신비로운 나라다.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오히려 일할 청년이 없는 걸 걱정하는 정권이 들어섰으면 한다.”

☞민계식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조선항공학과를 졸업했다. ROTC 장교로 월남전에 참전했고 미국 MIT대에서 해양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 귀국해 대우조선해양에 입사해 기술연구소장을 했고 1990년 현대중공업으로 옮겨 대표이사(2001~2011년)를 했다. 2008년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받았고, 2018년엔 국가과학기술유공자 32명 중 1명으로 선정됐다. 지금까지 낸 특허·실용 신안만 300건이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