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간의 체제 경쟁이 30여 년 만에 다시 시작됐다. 핵과 미사일 개발에 총력을 쏟아부은 북한이 미국 본토 공격이 가능한 핵 미사일을 확보했거나 조만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제 남한을 적화통일, 즉 남침(南侵) 대상으로 삼고 있다.”

안드레이 란코프(59) 국민대 교수는 “북한의 도전을 윤석열 정부가 과소평가하거나 착각해선 안 된다”며 “그동안 제로(zero)였던 ‘남벌’ 시나리오 가능성이 미·중 전략 경쟁과 북한의 핵무기 고도화 성공으로 지금은 5~10%로 높아졌다”고 말했다.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북한의 남벌 시나리오 가능성은 5~10%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0.01%의 가능성도 가볍게 보지 말고 냉철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송의달 기자

러시아의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에서 ‘조선시대 사색 당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85~1986년 평양 김일성대학에서 10개월간 유학했고, 한국에는 올해로 만 22년째 살고 있다.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정은 남매가 올해 4월, 북한 인민군이 대한민국 국군과 싸울 때 ‘전술핵을 사용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명언한 만큼, 북한의 남벌은 ‘꿈’이 아닌 ‘현실’이 되고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당사국인 러시아를 포함해 미국은 지금까지 핵 보유국과 직접 싸운 적이 한 번도 없다. 북한의 남침에 맞서 미국이 증원군 등을 보내려 할 때, 북한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뉴욕이나 LA 핵 공격을 위협한다면, 미국 대통령은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란코프 교수는 “미국에서 경제 위기가 발생하거나 고립주의가 고조될 때, 남한을 지킬 의지가 약한 대통령이 등장하는 경우, 북한은 이를 ‘기회’로 보고 도발을 감행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경우 미국 대통령이 수만명의 미국 시민 희생을 피하기 위해 참전을 주저할 수 있다. 한·미의 강력한 공조로 북한이 지금은 ‘남벌’을 할 수 없지만, 트럼프 대통령보다 더 젊고, 더 에너지 넘치는 새 미국 대통령이 트럼프식(式) 고립주의 같은 한반도 정책을 편다면, 어떻게 대응할지 한국 정부는 염두에 두고 대비해야 한다.”

그는 문재인 정부 5년간의 대북 정책에 대해 “문 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은 완전한 거짓이었다”며 “문 정부는 비현실주의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북한 관계에서 아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또 “북한 엘리트층은 적화통일만 수용할 수 있는데, 한국의 586 진보파는 묘향산을 자유롭게 올라가 북한인들과 얘기하고, 서울역에서 KTX 타고 북한 사리원을 구경하러 가는 미래를 상상한다. 이것은 불가능한 꿈”이라고 했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뉴스1

“한국 진보파는 남한과 다른 나라 정치 분석에선 집권 엘리트층을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북한과 중국에 대해서는 이런 비판성이 즉각적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북한 엘리트층을 ‘자주평화통일’ 열망으로 가득한 동반자로 보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환상이다.”

란코프 교수는 “쇄국 정책과 주민 감시·통제, 핵 개발은 북한 체제 유지에 필수적인 3대 도구”라며 “세 개 중 하나라도 느슨해지거나 없어지면, 수령 유일 독재 체제가 무너진다는 걸 북한 지배층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비핵화는 그래서 북한 엘리트들에게 자살을 강요하는 행위이다. ‘북한 비핵화가 가능한가’라고 묻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500살까지 살 수 있느냐’는 것과 똑같다.”

그는 “분단 100주년이 되는 2050년까지 통일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영구 분단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세계사를 보면 분단이 3~4세대, 즉 약 100년 동안 이어지면 공유하는 민족의식과 통일에 대한 생각이 사라진다”고 했다.

“한국 청년들은 점점 더 북한에 무관심하고 통일에 대해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10년 전쯤부터 한반도 양쪽에 ‘한국민족’과 ‘조선민족’이라는 완전히 다른 민족의식이 생겨나고 있다. 한국 청년들에게는 도쿄·뉴욕·파리가 평양보다 훨씬 친숙하고 편리하다.”

북한의 ‘남벌’ 야망을 무력화하는 방법을 묻는 질문에 란코프 교수는 “한미 동맹을 미·영, 미·일 동맹에 버금가도록 강화하고 격상하는 게 유일한 대안”이라고 답했다.

“미·영, 미·일 동맹의 결속도가 10점이라면 한미동맹은 6~7점이다. 이게 9~10점이 되도록 한국의 전략적 가치와 매력을 높여야 한다. 한미동맹이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한국의 생존을 지켜주는 다른 대안이 아직 없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새 대통령은 자신이 통일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망상을 버리고 북한의 위협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는 자신의 능력은 과대평가하고 상대 능력은 과소평가해 고전하고 있다. 안보에선 0.01%의 가능성도 무시해선 안 된다. 북한 핵무기가 권총이라면, 한국의 최첨단 재래식 무기는 물총이다. 지나친 낙관주의는 판단력을 마비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