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오후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제20전투비행단 소속 이모 중사의 빈소에서 조문객들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장련성 기자

전문가들은 성추행 피해 후 극단 선택을 한 공군 이모 중사 사건과 관련, “군(軍)뿐 아니라 정치권·기업·학교 등 사회 전반에 성추행 후 회유·은폐 시도와 2차 가해가 만연하다”며 “이런 구조적인 병폐가 피해자들을 죽음으로 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는 한편, 2차 가해를 가볍게 보는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를 두고 주변에서 “누구냐”며 수군거리는 문화가 피해자의 고립을 가져온다는 비판도 나온다.

국회입법조사처 허민숙 조사관은 7일 본지 통화에서 “ ‘미투’ 운동을 계기로 성추행 피해자들이 과거보다는 적극적으로 신고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당사자가 아니라 주변인의 변화”라고 했다. 허 조사관은 “주변 사람들이 성추행이 발생하면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피해자를 위해 증언하며 가해자 제재를 해야 한다”며 “지금 사회의 수준이 거기까지 가지 못해 이모 중사 같은 피해가 계속 발생한다”고 했다.

한국여성변호사회 서혜진 인권이사는 “정치권, 기업, 학교 등 남성이 요직을 장악한 대부분의 조직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며 “성 문제가 발생하면 주변 사람들이 피해자를 회유하고, 가해자 역시 ‘내가 이러면 되겠느냐’는 식으로 사과 형식을 빌어 압박을 한다”고 했다. 오히려 주변에선 성추행 피해자들의 ‘평소 행실’을 문제 삼기도 한다.

실제 지난해 박원순 전 서울시장, 오거돈 전 부산시장 등 여권(與圈) 정치인들의 성 추문 때도 주요 정치인들에 의한 ‘2차 가해'가 사태를 악화시켰다. ‘피해 호소인' 등 각종 말을 만들어 피해자를 괴롭혔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지난 2일 “두고두고 속죄해도 부족하다”고 했지만 여파는 계속되고 있다. 국회의 한 보좌진은 “영감(의원)의 말 한 마디면 잘릴 수 있는 곳이 국회”라며 “사건 발생 즉시 ‘이건 성폭력’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여성 하급자가 얼마나 되겠느냐”고 했다. 2016~2019년 경찰청 범죄 통계를 보면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추행’은 연 200~300건 꾸준하게 발생하고 있다.

창원대 철학과 윤김지영 교수는 “군뿐 아니라 성 문제에 직면한 한국의 거의 모든 집단이 ‘조직 보위(保衛)’로 간다는 게 문제”라고 했다. 윤김 교수는 “조직을 살리기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것이 관행”이라며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업계 내 ‘블랙리스트’에 올라 더는 발을 붙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피해자는 평소 믿었던 친구, 동료, 선후배마저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며 무너진다는 것이다.

실제 이 중사는 지난 3월 2일 성추행 피해를 당한 직후 5월 21일 극단 선택을 하기 전까지 복수의 상관, 성고충 상담관 등에게 수십 차례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 중사 주변 사람들은 이 중사 편에 섰을 때 자신이 겪을 불이익을 먼저 생각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자신의 무사 전역, 진급, 연금 등을 먼저 생각해 ‘방관’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 중사는 새로 전입한 부대에서도 ‘그 여군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분위기를 느꼈다고 한다.

정치권은 뒷북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사회에 만연한 ‘2차 가해' 근절은 외면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이 중사 사태와 관련,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종합적으로 병영 문화를 개선할 수 있는 기구를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군 범죄 근절 및 피해자 보호 혁신 태스크포스’를, 국민의힘은 ‘군 성범죄 진상 규명 및 재발 방지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이 중사 사건을 군의 문제로만 보는 인식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군 문제로 국한할 경우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피해자 탓하기’ ‘가해자에 대한 온정주의’를 뿌리 뽑을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허민숙 조사관은 “사회 전 분야에서 고통받는 피해자들에게 ‘아, 이번에도 반짝 법석만 떨다 끝나는구나’ ‘아무리 해도 안 되는구나’ 하는 좋지 않은 학습 효과만 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