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군인권센터 관계자들이 서울 용산구 국방부를 방문해 지난달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여성 부사관 사건과 관련, 가해자를 엄중 문책해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고 있다. /연합뉴스

성추행당한 공군 여성 부사관이 “없던 일로 하자”는 부대 측의 조직적 회유와 2차 가해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의혹과 관련, 국방부가 1일 군 검·경 합동수사팀을 꾸리기로 하는 등 대대적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사건 발생 열흘이 지나도록 쉬쉬하다 언론 보도 이후 비판이 쏟아지자 뒷북 수사에 나섰다는 지적이다.

충남 서산 공군 제20전투비행단에 근무하던 A중사는 지난 3월 2일 선임인 B 중사의 요구로 저녁 회식 자리에 불려 나갔다가 돌아오는 차량 안에서 B중사에게 강제 추행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튿날 A중사는 부대에 피해 사실을 신고했지만 상관들이 “없던 일로 해달라”며 B중사와의 합의를 종용했고, B중사는 ‘죽어버리겠다’는 식으로 나왔다는 게 유족 측의 주장이다. 가해자를 피해자와 분리하는 조치도 즉각 취해지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A중사는 청원휴가를 냈지만 성폭력 상담관에게 ‘자살하고 싶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등 괴로움은 계속됐다. 부대 전속(轉屬·소속을 옮김) 요청이 받아들여져 지난달 18일부터는 경기도 성남의 공군 제15특수임무비행단으로 출근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새 부대의) 최고 지휘관과 말단 간부까지 성폭력 피해자(A중사)에게 피해자 보호 프로그램을 적용하지 않고 압박과 스트레스를 가하며 관심 병사로 취급했다”고 주장했다.

A중사는 새 부대로 출근한 지 사흘 만인 지난달 21일 남자친구와 혼인신고를 마친 뒤 극단적 선택을 했다. 휴대전화엔 ‘나의 몸이 더럽혀졌다’ ‘모두 가해자 때문이다’ 등의 메모와 함께 마지막 순간을 담은 동영상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들은 전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부대 내 성폭력 사건과 이로 인한 조직 내 은폐, 회유,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난 사랑하는 제 딸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달라”고 했다. 이 글은 25만여 명의 청원 동의를 받았다.

이 같은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뒤에야 군은 ‘철저 수사’ 방침을 밝혔다. 서욱 국방부 장관은 이날 “성폭력 사건뿐 아니라 상관의 합의 종용이나 회유, 사건 은폐 등 추가적인 2차 피해에 대해서도 군 검·경 합동 수사 TF를 구성해 신속하고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공군은 “군 검찰과 군사경찰로 합동전담팀을 구성하고 국방부 검찰단의 수사 지원을 받아 모든 수사 역량을 총동원하겠다”며 “공군참모차장이 직접 총괄할 계획”이라고 했다.

유족측 변호인은 언론 인터뷰에서 “사망 직후에도 유가족이 소속 부대가 아닌 공군본부 차원에서 수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못 해주겠다고 했다”며 “사안의 심각성을 파악하는 데 사망 후 열흘이 걸렸다는 게 군이 이번 사안을 바라보는 수준”이라고 했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서욱 장관에게 전화해 “군 조직에서 이러한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군의 뒷북 대응을 강하게 질책했다고 총리실이 전했다.

정치권에서도 엄정 대응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민주당 송영길 대표는 이날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유족을 면담했고, 윤호중 원내대표는 “가해자를 비롯해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할 것을 군 당국에 요청한다”고 했다. 배준영 국민의힘 대변인은 “박원순·오거돈 성추행 사태에서 드러났듯 피해자에게 더 끔찍한 악몽은 ‘가해자 중심주의’에서 비롯된 2차 가해”라며 “철저하고 엄정한 수사를 국방부 장관에게 강력 촉구한다”고 했다.

시민단체인 군인권센터는 “성추행은 지난 3월 2일에 벌어졌고, 피해자가 사망한 시점은 지난달 말이다. 3개월 가까운 시간이 지나도록 군은 무엇을 한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며 “살 수 있는 사람을 죽게 만든 건 군 당국”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