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 직후 발표한 공동성명에는 “대만해협(Taiwan Strait)에서의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문구가 포함됐다. 한미 정상 공동성명에 중국이 거론 자체를 꺼리는 대만이 명시된 것은 사상 처음이다. 청와대는 미국의 중국 견제 전략에도 쿼드(Quad·미국·일본·호주·인도의 4국 연합체)엔 선을 그으며 동참을 꺼려 왔지만, 이번엔 쿼드도 언급됐다. 외교가에선 그간 미·중 갈등 국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앞세워 이른바 ‘줄타기 외교’를 해오던 문재인 정부가 미국에 다가선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대만 문제를 둘러싸고 미중 양국이 날카롭게 대립 중인 가운데 중국이 자국의 '앞바다'로 간주하는 대만해협을 미국 구축함이 또 통과했다. 미 해군 7함대는 18일(현지시간) 인터넷에 올린 보도자료에서 알레이버크급 구축함인 커티스 윌버함이 이날 국제법에 근거해 대만해협을 통과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2013년 8월 15일 필리핀해에서 촬영한 커티스 윌버함의 모습. /미 해군

공동성명에는 “한미는 쿼드 등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포용적인 지역 다자주의의 중요성을 인식했다”며 “남중국해 등에서 평화와 안정, 합법적이고 방해받지 않는 상업, 항행·상공 비행의 자유를 포함한 국제법 존중을 유지하기로 약속했다”는 내용도 담겼다. ‘중국’이란 표현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대만’ ‘쿼드’ ‘남중국해’ 등 중국을 겨냥한 키워드 3개가 모두 들어갔다.

전문가들은 “북한 문제에서 미국 지지를 얻으려 중국 문제에선 미국에 다가섰다”고 분석했다.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장은 “미국은 정교하게 중국을 겨냥한 정책들에 한국이 동참하도록 하는 ‘스테핑 스톤(stepping stone·디딤돌)’을 깔았고, 결과적으로 한국이 미국과 함께 발을 디딘 것”이라고 했다.

한미 정상 공동 기자회견에선 한 미국 기자가 문 대통령에게 ‘대만 문제에 관해 어떤 얘기를 했느냐.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에 대해 보다 강한 입장을 촉구했느냐’고 물었다. 이에 바이든 대통령이 문 대통령에게 “Good luck(행운을 빈다)”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이 대중 전략 동참에 신중한 입장을 표명해왔고, 미국 측에서 강하게 압박했다는 점을 시사하는 지점이었다. 우리 정부는 특히 대만 문제를 공동성명에 명시하는 데 주저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문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의) 압박은 없었다”면서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데는 인식을 함께했다. 양안 관계의 특수성을 생각하면서 양국이 협력해나가기로 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공개 석상에서 대만해협을 거론한 것도 이례적이다. 지난달 미·일 정상 공동선언과 비교하면 신장위구르, 홍콩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지만 ‘대만해협 평화·안정’은 똑같이 명시됐다. 또 중국을 타깃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쿼드’의 중요성과 함께 ‘코로나 발병 기원 조사’ 등 중국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의제들도 한미 공동성명에 포함됐다. 코로나 발병 기원은 그간 “중국이 코로나 발원”이라고 주장하는 미국·호주 등과 중국이 계속 갈등해온 사안이다. 전직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코로나 기원 조사는 중국을 자극할 휘발성 강한 문구”라고 했다. 일부에선 한국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두고 “연착륙이 필요한 중국 문제에서 경착륙한 것 같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러나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은 “대만의 안정과 평화가 우리 국익에도 직결된다는 우리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크랩 케이크 오찬… 바이든이 트위터에 사진 올려 -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오찬을 겸해 단독회담을 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트위터에 오찬 메뉴인 ‘메릴랜드 크랩 케이크’를 놓고 원탁에 마주 앉아 웃고 있는 사진을 직접 올렸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 트위터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안보 협력뿐만 아니라 백신 생산, 반도체·배터리·원전·6G 네트워크 등 한미 간 경제 협력도 대폭 강화됐다. 미중 간 경제·기술 경쟁에서 미국 진영에 가담한다는 의미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미국연구센터장은 “한국 정부가 미국의 요구를 대폭 반영해 기존 전략적 모호성에서 변화를 준 것인데, 중국 반응은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일단 중국은 공식 입장은 내지 않은 가운데 중국 관영 환구망은 대만·남중국해 언급을 놓고 “내정간섭”이라고 했다. 반면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문 대통령이 중국의 ‘레드라인’을 넘지 않으면서 미·중 이슈에서 한국의 원칙을 지켰다”고 했다. 김흥규 소장은 “한미 간 불안정성은 상당히 완화된 반면 중국 관계는 큰 과제가 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