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커피점 벽에는 영어도 러시아어도 아닌 이국적인 글자로 디자인 된 오래된 포스터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조지아어다. 6년 전에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를 방문했을 때 골동품 가게에서 구입했다. “1973″이라는 숫자 말고는 뭐라고 쓰여 있는지 하나도 몰랐으나 인터넷을 이용해 번역해준 어학 마니아 손님에 따르면 오케스트라 공연의 공지인 것 같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늘 음악이 있는 저희 공간에 잘 맞아서 마음에 든다.

내가 조지아라는 나라를 여행한 이유는 일본인 친구 Z군이 살기 때문이다. 나랑 비슷한 나이의 Z군은 줄곧 여행을 떠나 있는 것 같은 사람이고 그의 자유로운 삶에는 항상 자극을 받아왔다. 존경하고 동지 같은 존재다.

Z군과 만난 것은 내가 어학 유학생으로서 한국에 온 2006년 때였다. 그때부터 나는 홍대, 특히 산울림소극장을 중심으로 한 라이브 클럽 주변(지금 내가 운영하는 커피점 근처다)을 어정버정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12월의 추운 날, 내가 어떤 바에 앉아 있을 때 그가 들어왔다. 그런데 웬일인지 반팔 티를 입고 부들부들 떨고 있다. 대화해 보니 근처 클럽에서 놀다가 술에 취해 옷을 벗고 반팔 차림으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추위 때문인지 완전 술이 깬 얼굴이었다. Z군은 중국 유학을 마치고 일본에 돌아가는 길에 한국에 들렀다고 하고, 중국에서 만난 대구 친구 집에 머물며 주말마다 3시간 걸려 홍대로 올라왔었다. 그와 부산역 앞에서 만나 둘이서 대마도에 당일치기로 갔다 온 것도 좋은 추억이다.

다음 해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중국어 재능을 살려 바로 대만에서 취직했다. 그곳에서 6년간 지낸 그는 새로운 자극을 찾아 일본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서쪽으로 가는 여행을 떠났다. 결국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인 조지아에 도달해 그 나라의 매력에 푹 빠져 그대로 정주했다. 현지에서의 직장인 생활을 거쳐 지금은 현지 여행 가이드 겸 코디네이터로서 활약하고 있다. 벌써 8년을 그렇게 지냈다.

그런 Z군이 올해 코로나 사태가 끝나가면서 일본으로 잠깐 귀국하게 되었고 조지아로 다시 가는 길에 한국을 들렀다. 체류 시간은 단 5시간, 수수께끼의 항공권 때문에 김포공항에서 내려 짐을 들고 인천공항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에게는 십여 년 만의 한국 방문이니까 (그때는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우리 가게서 커피를 먹어주었다) 예전에 같이 놀았던 홍대 거리를 안내하고 싶다. 하지만 이동과 탑승 수속을 고려하면 홍대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단 한 시간 반 정도일까?

저녁 6시 반 김포공항에서 Z군과 재회하고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택시를 탔다. 목표는 우리 부부가 맨날 자주 가는 가정식 밥집이다. 소박한 맛의 보리밥은 미식가 Z군도 즐기는 모습이었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그다음 여행 가방을 끌며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밤의 홍대를 걸었다. 그는 옛날에 봤던 홍대의 모습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홍대입구역에 도착한 건 딱 9시였다. 비행기 출발 시간인 12시에 맞출 수 있는 시각이었다. 6년 만의 재회라는 느낌은 하나도 없고 평소와 똑같은 편한 목소리로 “그럼 또 만나요”라고 하면서 헤어졌다. 다음에 그와 만날 수 있는 것은 언제, 어디서일까? 전혀 알 수 없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좋다. 그가 가지고 온 경쾌한 이국의 바람을 느끼면서 “인생은 여행이다”라는 아주 흔한 말의 깊이를 생각했다. 생활에 쫓기기 일쑤인 나도 호기심을 잊지 않고 여행 같은 일상을 보내야겠다고 재확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