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김혜순 시인이 서울 마포구 문학과지성사 사옥에서 열린 14번째 시집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문학과지성사 제공

김혜순 시인은 김소월이나 정지용처럼 국민이 애송하는 시인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쪽에 가깝다. 시집 ‘날개 환상통’으로 미국 평론가들이 수여하는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은 걸 계기로 그의 작품을 접했다가 전위적인 시풍과 낯선 시어에 적잖이 놀랐다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서구 문화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시에 매혹돼 있었다. 이번 수상에 앞서 지난 연말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시집 5권’에 번역 시집으론 유일하게 포함됐고, 앞서 그해 7월엔 하버드대 도서관이 T S 엘리엇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해 결성한 ‘T S 엘리엇 메모리얼 리더’의 초청 낭독회 대상으로도 선정됐다.

영국은 더 일찌감치 그를 주목했다. 10년 전, 우리 예술의전당에 해당하는 런던 사우스뱅크센터가 선정한 세계의 ‘위대한 사랑시 50편’에 그의 작품 ‘구멍(A Hole)’이 포함됐다. 앞서 런던올림픽 때는 영국 문단이 김 시인을 초청해 낭독회를 열었고 이를 계기로 시집 ‘돼지라서 괜찮아’가 영국의 저명한 시 전문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됐다.

김 시인은 주로 여성성에 대해 쓰지만 그의 작품 속 여성은 아름답지도 사랑스럽지도 않다. ‘날개 환상통’ 속 여성도 ‘하이힐을 신은 새 한 마리/ 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처럼 기괴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그림에 비유하자면 표정은 일그러지고 피부는 격렬한 붓터치로 거칠게 표현된 피카소나 드 쿠닝 그림 속 여성을 닮았다. 그러나 동시에 두 거장의 그림들처럼 독자를 오래도록 시 앞에 붙들어 두는 힘이 있다. 뉴욕타임스가 ‘기괴하고 미래가 없는 상황 등 다양한 공포가 느껴진다’면서도 ‘미학의 거시적이고도 미시적인 힘을 전달한다’고 격찬한 이유다.

요즘 미국과 유럽 문화의 대세는 한마디로 탈(脫)백인이다. 오래되고 식상한 백인 위주 서사와 문제의식에서 벗어나 미국과 유럽 밖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봉준호 감독과 배우 윤여정·스티븐 연·양자경 등이 아카데미와 에미상 시상대에 잇달아 오르는 것은 서구 주류 사회가 소수자 배려 같은 PC(정치적 올바름)에 끌렸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의 고갈된 예술적 상상력을 아시아의 새로운 샘에서 찾는다고 봐야 한다. 김혜순 시집에 대한 관심도, 몇 해 전 소설가 한강의 연작 소설집 ‘채식주의자’의 부커상 수상도 이런 흐름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했다. 서구의 높아진 관심을 한국 문학 세계화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를 뒷받침할 우리 문학의 저변도 탄탄하다. 시집 ‘날개 환상통’은 한국을 대표하는 시 총서인 문학과지성 시인선에 포함돼 있다. 그 시인선이 최근 600호를 돌파했다. 창비시선도 500호를 넘어섰고 민음의 시, 문학동네 시인선도 수백호를 넘겼다. 시 총서가 수백호씩 이어지며 발간되는 사례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물다.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처럼 30년 넘게 사랑받으며 100쇄 가까이 찍는 시집이 나오고, 신문에 시가 연재되는 것도 외국 문인들은 놀라면서 부러워한다. 본지가 ‘현대시 100년 애송시 100편’을 연재할 때도 많은 독자가 시를 스크랩하고 암송하며 호응했다.

시집 번역도 활발하다. 문지 시인선만 해도 86권이 영어·불어·독어·일본어 등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됐다. 문인과 출판사, 번역을 지원해 온 한국문학번역원과 대산문화재단 등이 독자와 함께 이룬 성과다. 다만, 이번 총선에서 쏟아진 많은 공약 중에 문학 진흥 공약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쉬웠다. K문학 세계화를 문인과 출판사들에만 맡길 게 아니다. 정부와 각 정당도 팔 걷고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