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한 수뇌, 고육(苦肉)의 간담(懇談).’ 지난 21일 2년 9개월 만에 열린 한일 정상회담 관련,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사의 제목이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이달 중순 한국의 일방적인 정상회담 발표를 불쾌하게 여겼다. 그럼에도 북한의 위협, 미국의 화해 촉구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간담회 형식의 만남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윤석열 대통령과 악수하는 사진은 찍었지만, 양국 국기를 놓고 하는 정식회담과는 구별했다고 한다.

뉴욕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지난 21일(현지 시각) 오후 간 한일정상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뉴스1

윤 대통령의 대일 외교가 세련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일제 강점기 징용 배상 문제의 해결책이 완벽하지 않고, 회담의 세부 내용이 조율되지 않은 채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발표한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이번 회담을 통해서 윤 대통령의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추구하겠다’는 생각이 재확인된 것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임기 초반에 실수가 잇따르고 미숙한 ‘윤석열 외교’에서 가장 일관성 있으며 평가할 만한 부분은 한일 관계라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입증된 것이다. 그는 전임자인 문재인 전 대통령과는 달리 “한일 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고 수차례 약속하고 이를 지키는 중이다. 지난 5월 취임 후 동해(東海)를 건너오는 일본 고위급 인사와의 만남을 거부하지 않는다. 기자도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한일 관계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윤 대통령의 뜻을 잘 아는 박진 외교부 장관은 강제 동원 피해자를 찾아가 큰절을 하고 머리를 숙였다. 강제 노역 문제와 관련, 대법원에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한일 갈등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2014년 발족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입장도 구체화하고 있다.

한국에선 양국 간 역사적 갈등을 사상 처음으로 경제·무역 문제로 변질시킨 아베 신조 전 총리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27일 그의 국장(國葬)에 한덕수 총리와 정진석 국회 부의장을 보내 정중히 조문할 예정이다.

그래서 기시다 내각에 간곡히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이제는 일본도 국제법만 주장하지 말고, 달라진 한국 정부의 움직임에 부응해 손뼉을 마주쳐 달라는 것이다. 문재인 전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고,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을 그대로 수용, 일본 정부가 곤혹스러워진 것은 사실이다. 특히 외무상 시절 위안부 합의를 책임졌던 기시다 총리로서는 화가 날 만하다.

하지만 현재의 과거사 문제는 한국 정부의 움직임만으로는 절대 풀리지 않는다. 근원적으로 1945년 이후 일본에서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를 보였다면 이런 사태가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작금의 상황은 한일 양국이 과거사에만 파묻히기에는 동북아 정세가 여간 심각하지 않다. 유사시 선제적 핵 사용을 법제화한 북한은 어제도 탄도미사일을 날렸다. 힘을 기르려고 위장(僞裝) 연극을 해왔던 중국 공산당은 가면을 벗어던졌다. 우크라이나에 대놓고 핵무기 사용을 협박하는 러시아가 언제든 동북아로 눈 돌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한일과 각각 동맹을 맺은 미국은 태평양 너머에 있고, 그 힘과 국제사회에 대한 헌신은 예전 같지 않다.

지난해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던 노다 세이코(野田聖子) 전 간사장 대행은 본지 인터뷰에서 한반도 주변 상황을 거론하며 “한일이 운명 공동체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운명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피해자였던 국가가 적극 나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일본도 한일 기본 조약의 법(法) 조문에만 얽매이지 말고 앞으로 한 걸음 나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