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한국야구위원회) 구단 대표들은 지난 15일 이사회를 열어 정지택 전 두산 베어스 구단주 대행을 임기 3년 차기 총재 후보로 추천했다. 오는 12월로 임기를 마치는 정운찬 현 총재의 후임이다. 이번 총재 후보 추천은 대부분 야구인들이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철저한 보안 속에 이뤄졌다. 시기도 3년 전에 비해 한 달 반 정도 빨랐다. 여러 해석이 있지만, 정치권 입김을 일찌감치 막기 위해서라는 게 설득력 있어 보인다.

KBO 총재는 ‘정치 바람’을 많이 타던 자리다.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많은 ‘낙하산’ 총재들이 프로야구를 이끌었다. 리그 출범 초반엔 이들이 프로야구 기틀을 탄탄히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대부분 총재들이 재임 도중 정(政)·관(官)계로 진출하거나 비리 의혹으로 물러나는 등 단명(短命)에 그쳤다. 재임 기간이 25일인 총재도 있었다.

‘민선 총재’들이 주류를 이룬 2000년대 이후에도 정치 바람은 소멸되지 않았다. 역대 두 번째 최장수인 구본능 총재가 임기를 마쳤던 2017년에도 프로야구는 청와대 의중을 끊임없이 살펴야 했다. 올해도 이미 몇몇 야구인들이 총재 자리를 마음에 두고 청와대와 여권 실세들과 꾸준히 접촉하고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한 비밀처럼 나돌았다.

낙하산 타고 내려왔다고 모두 총재 자리를 잠시 대접받고 쉬다 떠나는 ‘휴게소’ 정도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 재임 중 성과를 일궈낸 사람도 꽤 있다. 야구인들이 직접 총재가 되는 것도 언젠가는 이뤄질 ‘역사’일 수 있다.

그러나 구단들은 이번에 프로야구를 스포츠 산업적 시각에서 다룰 수 있는 기업인을 적임자로 판단했다. 정치 바람을 탄 인사로선 코로나 팬데믹으로 맞이한 위기 타개에 한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구단주 총회 의결과 문체부 승인이란 절차가 남아 있지만, 과거에 10개 구단 대표로 구성된 이사회 결정이 번복된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외풍(外風)이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정치 바람이 강하게 부는 곳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대한체육회다. 내년 초 회장 선거가 열리는데 벌써 뒷말이 무성하다. 체육회는 이미 문화체육관광부와 한 차례 신경전을 펼쳤다. 체육회가 현직 회장이 사퇴 대신 직무정지 신분으로 차기 회장 선거에 나서도록 지난 4월 정관을 바꿨는데, 주무 부서인 문체부가 6개월 지난 10월에야 승인했다. 체육회가 정관을 바꾼 이유는 현 회장이 선거에 나서면 선거일 90일 전에 사퇴해야 하는데, 그러면 KOC(대한올림픽위원회)위원장 자격으로 지닌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직까지 잃게 되기 때문이다.

문체부는 이번에 늑장 승인을 하면서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선거인을 완전 무작위로 선정하는 등 현 회장이 다른 후보들과 같은 출발선에서 선거 레이스를 펼치는 내용이 주요 골자다. 선거의 공정성을 내세우는 명분은 납득할 만하지만, 왠지 시기가 묘하다. 그동안 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를 통합해 별 잡음 없이 운영되던 조직을 정부가 최근 분리할 것을 강력하게 주문해 현 체육회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런 정부의 분리 방침 뒤엔 체육계 출신인 여당 실세 의원이 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전해져 그 진의(眞意)에 의문부호가 달린다. 정부는 이미 현장의 목소리를 배제한 채 독단적인 스포츠 혁신안으로 체육계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우리는 정치권이 마구잡이 손길을 뻗친 사법·행정부가 본연의 기능 대신 또 다른 ‘적폐’의 도구가 되는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국민이 힘들고 지칠 때면 언제나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스포츠마저 정치로 덮을 생각은 제발 안 했으면 좋겠다.